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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04 19:30 수정 : 2006.01.18 16:26

걷고 노 젓고 페달을 밟아 미국을 3종 횡단하고 있는 데니스와 게리 스튜어트 부부.

걷고, 노 젓고, 페달을 밟는 ‘3종 횡단’으로 16개월째 미국을 가로지고 잇는 스튜어트 부부
더 젊었을 때 세상을 즐기고 싶다며 10년 빨리 은퇴하고 연금 감소도 감수했다
해저드로 가는 길에 자전거 여행의 행복한 위기가 찾아왔다
자동차로 3시간을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12

자전거뿐 아니다. 다종다양한 방법으로 미국을 횡단한다. 자동차, 기차, 그레이하운드 버스, 모터사이클, 배, 열기구, 말, 심지어는 잔디 깎는 차를 타고 횡단한다. 미 대륙이 광활하기는 하지만 모험해보기 적당할 만큼 넓다. 그래서 걸어서도 가고 뛰어서도 간다.

 그 중에서 내가 브레이크스 인터스테이트 공원에서 만난 데니스와 게리 스튜어트 부부의 횡단은 단연 창의적이다.

스튜어트 부부는 철인 3종 경기를 빗대 3P의 3종 횡단을 하고 있다. Pack, Paddle, Pedal. Pack은 배낭을 매고 걷는 것, Paddle은 배를 젓는 것, Pedal은 자전거를 타는 것을 뜻한다. 지난 해 4월6일 태평양 연안의 워싱턴 주 케이프 디서포인트먼트에서 배낭을 매고 걷기 시작, 1280㎞를 걸어서 몬태나 주 딜런에 도착했다. 거기서 카누로 갈아탄 뒤 3840㎞를 노 저어 미주리 강을 따라 내려와 미주리 주 세인트 찰스까지 왔다. 거기서 2인승 자전거를 타고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로 2080㎞를 페달을 밟아 버지니아 주 요크타운까지 가고 있었던 것. 모두 7200㎞의 여정.

 그들이 걷고 노 저은 구간은 대략 루이스와 클라크 원정대가 200여 년 전인 1804년부터 1년 6개월간 탐험한 루트와 일치한다. 미국의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은 1803년 나폴레옹 황제로부터 1500만달러라는, 지금으로 봐서는 헐값을 주고 루이지애나를 구입, 미국 영토를 미시시피강 동쪽에서 로키산맥 동쪽으로 확장시켰다. 당시의 루이지애나는 지금의 미주리, 아이오아, 네브라스카, 노스 다코타, 사우스 다코타 등 14개 주의 전부 또는 일부를 포함하는 광대한 땅. 제퍼슨은 새로 산 땅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서 루이스와 클라크 원정대를 파견했다. 이 탐험은 지금도 미국인들의 모험심을 자극하는 원천으로 남아 있다.

53살의 데니스는 이 여행을 위해 정년보다 10년 먼저 은퇴했다. 더 젊을 때 세상을 보고 즐기고 싶어서 연금이 25%나 줄어드는 것을 감수했다. 생활비를 줄여 쓰면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그 역리를 터득한 것이다. 가을에는 농무부의 임시 검사원으로 시간당 11달러를 받고 콩, 옥수수, 밀의 질을 검사하는 일도 하면서 생활비를 보조하고 있다. 그들의 여행기록은 www.ctcis.net로 가면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을 속으로 욕했던 내가 민망해지는 일이 생겼다. 80번 도로 변에서 쉬고 있는데 픽업 트럭이 멈춰서더니 젊은 남자가 다가와 도와줄 게 없느냐고 물었다. 누가 이 길로 돌아오면 쉬울 거라고 해서 왔는데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고 푸념하니까 그는 그래도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로 질러왔다면 더 힘들었을 것이라면서 트레일에서 가장 험악한 두 봉우리를 피한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라고 했다.


자전거로 세계를 일주한 스티븐슨

 기왕 미국 횡단 얘기가 나온 김에 자전거 횡단사를 되짚어 보면 자전거로 미국 횡단은 물론 세계를 일주한 최초의 인물은 토머스 스티븐스(Thomas Stevens)다. 1884년 8월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를 출발해 103일만에 동부 해안의 보스턴에 도착했다. 그런 뒤 영국으로 배를 타고 가서 유럽과 중동을 관통한 뒤 홍콩과 일본을 들러 배를 타고 2년 4개월만인 1886년 12월 샌프란스시코 항구로 귀환했다. 총 주행거리 2만1600㎞.

 그의 세계일주는 마젤란의 일주 못지않은 기념비적 업적이다. 장거리 교통수단으로서의 자전거의 위상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그가 탄 자전거는 지금 우리가 타던 자전거와 달랐다. 페니-파딩(Penny-Farthing)이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진 ‘보통 자전거’. 옛 영화를 보면 앞 바퀴가 뒷바퀴에 비해 비대칭적으로 큰 자전거를 볼 수 있는데(사진 참조) 영국 화폐로 1페니 동전이 1파딩보다 컸기 때문에 페니-파딩 자전거라는 별명이 붙었다. ‘보통 자전거’로 불린 이유는 바퀴가 하나에서 두 개로 늘어나 상대적으로 타기가 그 전보다 용이해졌기 때문. 스티븐스는 그 ‘보통 자전거’를 타고 갔다. 이 자전거는 급정거시 라이더를 앞 바퀴 너머로 날려보내는 특징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이 앞과 뒷바퀴가 거의 같은 크기의 자전거가 개발됐을 때 ‘안전 자전거’로 불렸다. 당시에는 미 대륙을 잇는 도로도 없을 때였다. 철로는 있었다. 그래서 그는 기차 터널로 산맥을 뚫고 가다가 마주오는 기차를 피해 터널 벽에 바짝 몸을 붙여야 할 때도 있었다. 여벌의 셔츠 한 벌과 양말 그리고 텐트 겸 이불로 쓰이던 비옷 한 벌만 가져갔다. 이 대목에서 한마디. 왜 기술이 발전할수록 가져가는 짐의 무게가 더 늘어나는지.

최초로 자전거로 타고 일주한 토마스 스티븐스가 탄 자전거와 같은 종류의 ‘보통 자전거’
여성을 코르셋에서 해방시키다

 그는 여행을 마치자 바로 영웅이 됐다. 그때는 자전거의 시대였다. 그러나 1935년 81살을 일기로 그의 모국인 영국 요양원에서 숨을 거둘 때 그의 이름은 미국에서 잊혀진 지 오래였다. 자동차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나는 자전거를 타면서 힘들어할 때마다 고난에 찬 당시의 여정을 떠올린다. 또 한 사람. 마가렛 발렌틴 르 롱(Margaret Valentine Le Long). 젊은 여성이었던 롱은 1896년 시카고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자전거로, 그것도 혼자 여행했다. 소요된 기간은 불과 2개월. 역시 여벌 셔츠와 속옷 각 한 벌과 세면도구 그리고 권총 한 자루를 들고 갔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데이비드 램 기자는 롱의 여행에 대해 “1960년대 페미니스트들이 거리에서 브래지어를 불태우면서 여성해방을 외친 것만큼 대담한 선언이었다”고 말했다. 실로 자전거는 여성을 몸을 옥죄이던 코르셋에서 해방시켰다. 자전거가 보편화되면서 치마가 짧아졌고 여성들은 남자들과 나란히 바지를 입게 됐다.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 마을에서는 조례를 통과시켜 여성들이 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지만 대세는 막지 못했다. 혁명 자전거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해저드로 가는 길에 자전거여행의 행복한 위기(?)가 찾아왔다. 핸드폰이 울렸다. 나는 핸드폰을 싫어해서 평소에는 핸드폰이 없는데 이번 여행에는 임시 핸드폰을 사서 가지고 다녔다. 김경보였다. 고교동창. 캔터키 주 렉싱턴(캔터키 주에도 렉싱턴이 있다)에 산다.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이 렉싱턴 근처를 지나가는 것을 알고는 꼭 집에 들르라고 했었다. 나를 태우러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그 지점에 내려주면 미국 횡단에 아무런 차질이 없는 것 아니냐고 구슬렀다. 자동차세력들은 결국 학연을 동원해 자전거 여행 도중에는 자동차를 안 타겠다는 내 의지를 꺾었다. 물론 내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번졌다.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고 빨래도 하고 한국음식으로 포식할 기회.

 그는 자동차로 세 시간을 달려 해저드까지 와서 나를 태우고 갔다. 차를 타고 가니 어지러웠다. 속도계를 보니 시속 80㎞밖에 안 되는데 청룡열차를 타고 가는 듯했다. 불과 몇 주 전까지 나도 그런 속도로 달렸다. 속도라는 게 얼마나 기만적인가.

처음에는 하루만 그의 집에 머물 예정이었으나 그가 붙잡는바람에 못 이기는 척 하고 몇일 머물렀다. 거기서 태풍도 피했다. 숯불 바베큐에 비빔면, 냉모밀국수… 내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아내는 내가 먹고 싶은 것만 차려줬다. 캔터키대 교수로 일하는 그와 함께 아침에 출근해서 그는 연구실로 가고 나는 도서관으로 갔다. 아름다운 대학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은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 못지 않은 세계 탐험이다.

경보는 고교 시절에는 뛰어나게 공부를 잘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대학시절부터 무섭게 공부를 해서 포철공대 대학원 다닐 때는 세계적인 화학 저널에 논문도 싣고 오하이오 주립대로 유학, 암세포를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예일대에서 포스트닥 코스를 마치자마자 미국 내에서 손꼽히는 캔터키대 약학대학원에 자리잡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혼자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그런데 대학교수면 일년에 최소한 몇 달씩 방학이 있어 좋은 줄 알았더니 지금도 일년 열 두 달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한번 실험을 시작하면 밤새는줄 모르고 실험실에 남아 있다. 부인도 박사다.

휴식, 삼보 전진 위한 일보 후퇴

어차피 라이딩을 잠시 접고 머무는 김에 자전거를 손보고 페달도 교체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이클화도 사 신었다는 것. 그 동안 사이클화도 없이 샌들을 신고 맨발로 자전거를 탔다. 데니스 스튜어트가 나를 보고 한 첫 마디는 “아니 샌들을 신고…”였다. 기겁을 했다. 나로서는 샌들을 신으면 발이 시원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클리트(Cleat)가 바닥에 달린 사이클화가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클리트는 다리의 힘을 정확히 페달에 전달하기 위해 페달과 신발을 결합하는 쐐기다. 문제는 자전거를 멈출 때 클리트를 페달에서 제때 빼내지 못하면 자전거에 발이 묶여 함께 넘어질 수 있다는 것. 몇 번을 넘어졌다. 한번은 서울의 지하철 공사장에서 버스 승객들이 일제히 쳐다보는 가운데 넘어졌다. 왼쪽 엉덩이로 철판 위에 떨어질 때의 통증에다 이목을 의식해 아픈 내색도 하지 못하는 고통까지 겹쳐 클리트가 달린 사이클화에 대해 무섬증이 생겼다.

 그러나 넘어지는 과정을 겪어서 라이더가 되는 것이다. 애팔래치언 산맥을 샌들로 고통스럽게 넘은 뒤에는 더 이상 그 과정을 미룰 수 없다는 자각이 생겼다. 사이클화를 샀고 효과가 있었다. 밟는 힘뿐 아니라 당기는 힘으로도 페달을 돌릴 수 있어 보다 많은 다리 근육을 가동할 수 있게 됐다.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홍은택
이제는 다시 출발할 때다. 쉬는 동안 산과 들판에서 비바람을 맞고 있을 라이더들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며칠간 식객 한 것만도 미안한데 3시간이 걸리는 해저드까지 다시 태워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대신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인 어바인으로 데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아메리카 횡단 여행에서 캔터키 주 해저드-어바인까지 140㎞는 선이 끊겼다. 마음이 찜찜했지만 더 많은 길을 헤매는 것으로 벌충하는 수밖에 없다. 다시는 중단 없이 길을 달리기로 결의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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