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9.08 19:49 수정 : 2006.01.18 16:23

일리노이 주 엘리자베스타운에 있는 민박집의 매그놀리아 나무. 이 나무 아래 긴 의자에 누우면 오하이오 강이 눈높이로 흐른다.

중부시간대로 들어온데 이어 일리노이주 입성
27일만에 세번째 주…이젠 본궤도 오른셈
오하이오 강변 민박집 그늘 아래 몸을 맡겼다
수만년 태연히 흐른 강물 보며 떠오른 화두
‘변하는 것도 변하지 않는 것도 없다’
과거·미래만 있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17

캔터키 브레킨리지 카운티 안으로 바퀴를 밀어넣음으로써 동부에서 중부시간대로 들어왔다. 시침을 한 시간 뒤로 돌려야 한다. 한 시간을 번 것이다. 시간 변경선을 넘는 것은, 미국이 커서 그렇지, 보통 한 나라를 넘어도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과 일본은 같은 시간대다. 지구는 24시간의 시간대들로 구획돼 있고 지구 원주의 각도는 360도니까 이론적으로 15도만큼 달려야 시간대가 바뀐다. 이걸 24번 반복하면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을 1400㎞ 페달을 밟아서 이뤄냈다.

그런데 기분이 묘하다. 주의 경계도 아닌, 같은 캔터키 주 안의 카운티들 사이에 시간이 바뀐다. 바로 인접한 하딘 카운티의 84번 길가에 있는 주유소에서 오후 4시에 루트 비어를 사 마시고 50분을 달려서 브레킨리지 카운티에 들어왔는데 시간은 아직 4시가 안 됐다. 두 카운티를 지나면서 해가 잠시 후진한 것일까.

미국은 동부, 중부, 마운틴, 퍼시픽 타임 4가지로 시간대가 정해져 있다. 각 시간대마다 1시간씩 차이가 나 동부와 퍼시픽 타임은 3시간 차이다. 그래서 미국을 동부에서 서부로 횡단하는 것은 3시간을 버는 시간 여행이다. 반면 서부에서 동부로 횡단하는 것은 3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인데 왜 더 많은 바이크 라이더들이 이 방향을 택하는지 모르겠다. 그 이유는 나중에 동진 라이더들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한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동부이고 어디부터 중부일까. 시간대 구분법에 따르면 하딘 카운티는 동부고, 브레킨리지는 중부다. 캔터키 한 주 안에 동부도 중부도 있다는 얘기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두 카운티 사이에 15도 각도를 나누는 선이 지나가서일까. 아니다. 이것은 뉴욕의 흡인력을 증명하는 정치 경제적 타협의 소산이다. 비즈니스의 중심인 뉴욕과 같은 시간대에 들어가기 위해 많은 도시와 주들이 무진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뉴욕의 시간대인 동부시간의 경계가 차츰 넓어지기 시작했는데 캔터키 주를 통째로 집어넣기는 무리여서 브레킨리지 카운티에서부터 서쪽 일부 지역은 동부 시간대에 들어가지 못한 것. 같은 예로, 시카고도 동부 시간대로 들어가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중부 시간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면 시카고에서 동쪽으로 얼마 안 떨어진 디트로이트는 동부시간대로 들어갔다.

시간대 구분도 정치적 타협의 산물


시간의 흐름은 자연적인 현상이지만 그 흐름에 금을 긋는 것은 극히 인위적인 일이다. 지금처럼 일년, 열두 달, 365일, 주 7일, 하루 24시간, 한 시간 60분, 1분 60초로 똑같이 시간에 금을 긋고 있는 것은 인류역사상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스탈린 시절의 소련에서는 한 주가 처음에는 5일, 조금 지나서는 6일이었다. 주 7일제로 하면 토·일요일 이틀을 쉬기 때문에, 그리고 주 5일제로 하면 닷새마다 하루 쉬기 때문에 노동일수를 늘리기 위해 주 6일 하루 휴일제를 채택한 것.

하루 24시간 중에서 언제를 몇 시로 할 것인지도 최근에서야 정해졌다. 미국에서는 19세기 말까지도 각 지역이 알아서 태양을 보고 시간을 정했다. 그래서 같은 동부에 있어도 필라델피아 시간은 뉴욕보다 5분 느렸고 볼티모어보다는 5분 빨랐다. 이 같은 ‘시간자치제’로 가장 고통받은 사람은 열차시각표를 정하는 철도회사직원들이었다. 미국을 횡단하는 열차는 1백 개 이상의 다른 시간대들을 지나갔는데 각기 다른 현지시각마다 정확한 발착시각을 표시하기 위해 시각표담당 직원들은 불면의 날들을 보내야 했다. 문제가 더 복잡한 것은 철도회사 자신들도 회사마다 다른 시간을 썼다는 점. 펜실베니아 철도회사는 필라델피아 타임, 미시간 센트럴 철도회사는 디트로이트 타임을 사용했다. 한 기차역의 착발시각이 철도회사마다 달랐으니 역에는 다른 시간을 표시하는 수많은 시계들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참다 못한 기차회사들은 1883년 미국철로협회 회장이던 W.F.앨런이 일반시간협정(General Time Convention)을 제안하자 두말없이 채택했다. 아무 강제력이 없는, 기차회사들끼리의 협정이었지만 기차가 지나가는 도시들도 앞다퉈 이 협정을 받아들였다. 얼마나 그 동안 다른 시간대로 고통을 받았으면…. 이 협정의 골자는 미국을 바로 15도 각도에 따라 4개의 시간대로 나눈 것. 이 협정의 정신인 표준시간제가 법으로 채택된 것은 훨씬 뒤인 우드로 윌슨 대통령 시절인 1918년이었다. 이 법에서는 주간상거래위원회(ICC)에 각 시간대별 지역을 결정하는 권한을 줬는데 ICC는 시간대를 빠른 쪽, 그러니까 동부시간대로 옮겨달라는 지역들의 등쌀에 견디다 못해 그 권한을 교통부에 넘겨버렸다. 미국처럼 4개의 시간대가 가능한 광활한 국토의 중국은 이런 분란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동쪽에 치우쳐 있는 베이징 시간대 하나로 통일해버렸다. 덕분에 해가 오전 7시에 베이징에서 뜰 때 신장에서는 오전 10시가 넘어도 해 구경을 할 수 없다.

캔터키와 일리노이 주 사이로 흐르는 오하이오강에는 바지선이 다닌다. 10분 간격으로 운영되는 바지 선에 자전거를 싣고 즐거워하는 필자.
19세기 ‘강적’ 소굴, 주립공원으로

어쨌든 중부시간대로 들어온 데 이어 오늘은 캔터키 주를 떠나 일리노이 주에 진입했다. 27일만에 10개 주 중 세 번 째 주까지 들어왔으니 여행이 본 궤도에 오른 셈이다. 일리노이 주로 가기 위해서는 오하이오강을 건너야 한다. 강을 건너다주는 바지 선에 자전거를 실었다. 강바람이 땀을 씻고 간다. 성취감에다 여행의 초반국면을 무사히 넘긴 데 대한 안도감을 오래 누리고 싶은데 10여 분만에 배가 일리노이 주 케이브 인 록에 도착했다. 자동차들과 오토바이가 먼저 빠져나가고 나는 마치 자동차를 모는 것처럼 배 위에서 자전거에 올라타 바로 육지까지 페달을 밟아 올라갔다. 교통수단으로서 자전거의 지위를 격상시킨 것 같아 우쭐했다.

케이브 인 록에는 입구의 높이만 7.5m나 되는 큰 동굴이 있다. 19세기 초 이 곳을 근거지로 암약하던 (해적이 아니라) 강적들은 새 삶과 넓은 평야를 찾아 강을 건너던 이민자들을 약탈했다. 한번 동굴로 들어가면 살아나온 사람이 없어서 그 희생자의 수는 알 길이 없다고 한다. 나중에는 술집 겸 사창굴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주립공원의 일부가 됐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은 웃으면서 오하이오강을 건넌다.

케이브 인 록에 있는 한 교회 앞에서 영국에서 온 두 마크를 다시 만났다. 앨리슨의 소식을 물으니 그들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얼마나 멀리 갔을까 궁금했다. 쉬지 않고 계속 페달을 밟았다. 혹시 그를 따라 잡지 않을까 무망한 기대를 품고서. 그러나 앨리슨은 보이지 않고 해가 저물어 오하이오 강변에 있는 엘리자베스타운의 베드 앤드 브렉퍼스트(B&B)에 여장을 풀었다. 유료 민박집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베드앤드브렉퍼스트는 모텔보다 비싸기는 하지만 돈이 아깝지는 않다. 집과 같은 편안한, 때로는 고풍스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아침 식탁에서는 다른 손님들과 함께 둘러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식사를 한다.

내가 묵은 이 집 마당에는 단단한 잎사귀를 가진 매그놀리아 나무가 근사하게 뻗어 있다. 이 나무 그늘 아래 긴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눕자 눈 앞으로 강물이 흐른다. 달이 떠올라 강을 비추는 광경에 왜 그렇게 빠져들었는지 모르겠다. 수천년 수만년 되풀이돼온 것일 텐데 나는 꼼짝 않고 그 강물에 젖은 달빛을 바라보았다.

여행을 하다 보면 문득 정적 속에서 우주의 비밀을 접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언젠가 지금 같은 달빛을 본 적이 있다. 2003년 2월 나일강가에서였다. 수 천 년 전에 세워진, 지금도 짓기 어려운 왕릉과 석상의 유적들이 널려져 있는 이집트의 룩소. 그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짓고 영생을 얻으려 했던 왕들은 미이라의 껍데기로 남아 있는데 나일강은 지금도 태연히 흐른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변하지 않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지금 오하이오 강을 보면서 그 화두가 떠오른다.

앨리슨은 얼마나 갔을까

나는 그 동안 항상 뭘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다. 목표를 이루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잠시고, 곧바로 보다 어려운 목표를 설정해 스스로 채찍질했다. 그래서 현재는 미래로 가는 하나의 디딤돌에 불과했다. 그 무수한 디딤돌을 밟아서 가는 미래는 항상 저 멀리 달아난다.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다. 현재가 내 삶에서 소외돼 있는 것이다. 직선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내게는 두 점, 다시 말해 과거와 미래밖에 없었다. 그 두 점을 잇는 선분인 현재는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런데 자전거 여행은 과거와 미래를 천천히 연결함으로써 보다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속도를 다투는 시간성에서 벗어남으로써 과거와 미래로부터 해방돼 무시간성 또는 초시간성을 느낄 수 있는 계기를 부여한다.

천년 만년을 흐르는 강물도 사실은 시간의 소산이다. 언젠가는 강줄기가 말라 사막이 되거나 물이 차고 넘쳐서 바다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시간의 단위가 워낙 아득하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주면서 동시에 초시간성에 대해 생각해볼 단초를 제공한다. 저 강조차 영속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영속하는가. 영속하는 것이란 없는 것인가. 변한다는 것만은 영속하지 않는가. 그러나 영속하는 게 어떻게 변화하는가. 그래서 결국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변하지 않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는 역설이 탄생하는 것이다. 역설은 규정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규정하려고 할 때 만들어진다. 규정할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저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

홍은택/〈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hongdongzi@naver.com
우연히 우리는 지구라는 같은 우주선을 얻어 타고 매일 공짜로 우주여행을 한다. 태양을 도는 이 우주선의 궤적에 비교해보면 우주선 안에서 자전거로 여행하는 것은 16절지에 연필로 선을 긋는 것보다 더 큰 일은 아니다. 그래도 나는 페달을 밟는다. 이 일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게 현재를 사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도 아니고 많은 거리를 달성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바퀴를 돌리면서 나는 현재에 더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살고 있다는 것을 더 진하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에 빠져 오하이오 강변에서 이틀이나 머물렀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