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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03 22:13 수정 : 2006.01.18 16:19

장대하고 광활한 캔자스 대평원을 달리는 데이비드의 머리 위로 무해한 흰 구름이 지나간다.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25)


아침 7시에 출발하기로 했는데 7시에 잠이 깼다. 황급히 데이비드의 방으로 가니 그는 이미 사이클복을 다 입고 아침도 먹고 짐을 꾸리고 있는 중. 오랜만에 만난 동행인데 혹시 먼저 가버릴까봐 맘이 급해졌다. 30분만 시간을 주면 다 준비해서 오겠다고 말했다. 사정조였다. 그는 괜찮다고 서두르지 말라고 했지만 신병의 일조점호 준비자세로 볼일을 다보고 짐을 꾸리고 일기예보까지 확인하고 그의 방으로 가니 7시26분.

그런데 그는 아직도 짐을 싸고 있었다. 전날 그는 짐싸는 데 보통 한 시간 반이 걸린다고 해서 농담인줄 알았다. 매일 짐을 싸는 데만 거의 수원역에서 서울역까지 전철 타고 출근하는 시간이 걸린다니…. 아직도 안 싼 짐들이 방 곳곳에 널려 있다. 오히려 내가 20분을 더 기다려 7시46분에야 유레카를 뜰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누구랑 같이 자전거 타는 게 처음이어서 어떻게 호흡을 맞춰야 할지 몰랐다. 먼저 가라고 말하고 보니 먼저 가는 사람이 바람을 먼저 맞아 더 힘이 들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먼저 가겠다고 하니 그는 번갈아 앞을 서자고 했다. 그는 앞서 가다가 30분도 안 돼 멈추고 숲으로 가서 소변을 보고 왔다. 불길한 전조였다.

그는 트레일러라고 불리는, 자전거로 끄는 짐수레 대신 패니어에 짐을 싣고 간다. 자전거에 다는 가방을 패니어(pannier)라고 하는데 예전에 말과 당나귀의 등 좌우로 달고 가는 광주리에서 유래한 말이다. 패니어라는 말을 알면 자전거여행에 대해 뭔가 아는 사람으로 대접 받는다. 자전거 앞뒤 바퀴 양쪽에 각각 걸이를 달고 패니어를 걸친다. 자전거의 무게 중심이 뒤쪽으로 쏠려 있기 때문에 짐무게의 60%를 앞 바퀴 패니어에 배정해야 좋다. 좌우 양쪽 짐 무게가 균형을 이뤄야 함은 물론이다. 이런 것들이 성가셔 패니어 대신 트레일러를 끌고 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트레일러에는 더 많은 짐이 들어간다. 내가 끌고 가는 밥 약(Bob Yak)이 가장 대표적인 상표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짐수레를 분리시켜 자전거만을 타고 돌아다닐 수 있는 이점도 있다. 실제 그렇게 하지는 않게 되지만.

짐 8개나 달고 달리는 그

그는 두 쌍의 패니어 그러니까 4개의 가방에다 핸들바와 뒷바퀴 짐 선반 위에 각각 가방 2 개씩 모두 8개의 가방을 싣고 간다. 그러니 무게는 고사하고 부피가 커서 바람의 저항을 많이 받는다. 그의 뒤를 바싹 좇아가면 그의 자전거가 바람을 막아줘서 편히 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그는 너무 느렸다. 내리막길에서는 워낙 무게가 많이 나가는 바람에 가속도가 붙어 나보다 더 빨리 달렸지만 캔자스 대평원에는 내리막길이 거의 없다.


같이 달리는 기쁨은 잠시. 그가 선두로 나갈 때 나는 속도를 줄여야 했을 뿐만 아니라 자주 멈춰야 했다. 그는 가게가 나올 때마다 들렀고 가게가 안 나오면 안 나오는 대로 길가에 멈춰 뭔가를 먹었다. 그는 저혈당이어서 빨리 칼로리를 섭취하지 않으면 급격히 체력이 저하한다고 설명하면서 양해를 구했다. 어떻게 만난 동행인데 양해 안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먹고 마시는 것의 간격도 그 동안 통제해서 물도 한 시간에 한번씩 마신다. 거의 30분마다 한번씩 그가 물 마시는 것을 보기 위해 멈춰야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데이비드의 자전거에는 무려 8개의 가방이 달려 있어 바람의 저항을 많이 받는 바람에 속도를 잡아먹었다.
그는 음식만 먹는 게 아니었다. 핸들바에 있는 그의 가방 속을 살펴보니 약통만 5개가 있었다. 비타민제에다 두통약, 알레르기약 등등. 그는 사무실에 있을 때는 계속 콧물이 나왔는데 자전거를 타고 대지로 나오니까 알레르기도 없어진 것 같다고 하면서도 약병을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멈출 때마다 휴대전화를 열어보며 서비스가 되는지를 확인했다.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고 두고 온 세계와의 연결에 집착하는 모습이 좀 안 돼 보인다. 가족도, 직장도 없어 전화 올 데가 없어 보이는데.

그의 목소리는 50대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럽고 윤기가 있다. 액센트가 동부 쪽이어서 알아듣기도 쉽다. 그는 테크놀로지컬 라이터(technological writer)다. 번역하면 기술작가. 건축용 소트프웨어의 사용설명서를 쓰는 게 그의 일이다. 까다로운 기술언어를 보통 쓰는 말로 바꾸는 게 직업이어서 그런지 복잡다단한 얘기도 그는 쉽게 할 줄 안다.

앗, 출발약속시간에 일어나버렸다
행여 먼저 떠날까 후다닥 준비끝
그런데 그는 짐싸는데 만 1시간반…
30분마다 소변…가게마다 들르고…
수시로 통화 이탈되나 확인
이크, 불길한 전조다!

나는 전부터 사용설명서 쓰기가 신문기사나 시, 소설보다 더 중요한 글쓰기라고 생각해왔다. 기술의 세계에서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주문이 필요하다. 주문을 모르면 기계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열려라 참깨와 같은 주문이 매뉴얼이다. 세상에는 뜻 모를 매뉴얼이 너무 많다.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일 때 조립 설명서를 보고 모형비행기를 대신 조립해주려는데 눈이 아려왔다. 새벽 1시가 넘어 아들은 완성품을 보려다가 지쳐 쓰러져 잠 들고 나는 설명서의 난해한 언어에 절망했다.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에 했던 것과 똑같이 막대기들을 고무줄로 둘둘 말아서 모형항공기라고 해놓고 나도 잠들었다.

데이비드는 그런 문제점을 없애기 위해 자기가 다니던 회사에서는 기술작가들이 소프트웨어 개발단계에서부터 참여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나오면 개발자에게 직접 문의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려 있다고 한다. 그렇게 사용자의 관점에서 기술을 통제할 수 있다면 기술이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기술작가들을 소중히 여겨야 하고, 기술작가들은 사용자들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분연히 궐기해야 할 때라고 믿는다.

평생 못본 서부 보겠단 꿈에

그런데 자전거와 같은 기술만 있다면 기술작가들은 굶어 죽을 것이다. 사용설명서조차도 필요 없는, 인간친화적인 기술이기 때문이다.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실용적이며 인간과 하나가 된다. 나는 궁극적으로 기술작가들이 밥 먹고 살기 어려운 세계를 꿈꾼다.

데이비드는 이번 여행을 위해서 직장까지 관뒀다. 펜실베니아 주 토박이인 그는 반 세기 이상 사는 동안 미시시피강 서쪽으로 가보지 못했다. 더 늦기 전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서부를 보기 위해 장도에 올랐다. 원래는 2년 전에 출발했다. 그 때 동부에는 비가 많이 왔다. 쫄딱 젖어서 650㎞를 달렸을 때 그 악명 높은 캔터키 개의 습격을 받았다. 송아지만한 개가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좇아와서 페달을 세게 밟아 개를 따돌리려고 했다. 이 정도면 더 이상 못 좇아오겠지 하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균형을 잃으면서 자전거와 함께 길에 나뒹굴었다. 엉덩이로 먼저 떨어졌는데 아파서 바로 일어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달려와서 부축하고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는 동안 그 개를 풀어놓은 집주인은 멀뚱히 쳐다보다가 집 안으로 들어가버렸다고 한다.

동네 병원 의사는 허벅지에 죽은 피가 뭉쳐 있다면서 주사로 뭉친 피를 빼냈다. 그러자 뭉친 피가 빠진 진공으로 주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피가 몰려들면서 허벅지가 퉁퉁 부어버렸다. 걸을 수가 없는 상태. 의사는 태연히 이제는 다리를 절단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캔터키 사람답다. 기겁한 그는 의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간호사에게 도대체 의사가 뭘 알고 치료하는 거냐고 물으니 간호사가 “글쎄, 잘 모르겠다”고 말해서 그 길로 펜실베니아 주에 있는 자신의 집 근처 병원으로 옮겼다. 이 병원 의사는 주사로 죽은 피를 빼낸 게 잘못된 처방이었다면서 어쨌든 자전거 여행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고했다.

그는 어제 애인 전화를 받았다 사실상 절교 선언
통화서비스 가능지역이 더 괴로울 것이다
53살 남자에게 해줄 말이 없다 스콧시티의 ‘핫걸’ 외에는…

그 뒤 절치부심 2년 동안 준비한 끝에 다시 미국 횡단에 나섰다. 배수의 진을 치듯 월세 살던 집도 정리해서 모든 짐을 창고에 맡겨놓고 왔다. 내가 갖고 있는, ‘홀트(Halt)’라는 개 스프레이보다 훨씬 강력한 치한 퇴치용 스프레이를 장착했다. 반 정도 썼다고 한다. 캔터키 주를 건너는 동안 미친 듯이 스프레이를 뿌렸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래도 임시로 돌아갈 곳은 있었다. 여행 후 다시 직장을 구할 때까지 애인 집에 기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어제 나를 만나기 직전 애인의 전화를 받았는데 그는 그 이후부터 정신적 공황상태에 있다. 애인은 아이를 입양하게 될 것 같다면서 그러면 사회복지요원들이 다른 남자가 입양아와 같이 사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 뜻은 그가 들어올 자리가 없다는 것. 갑자기 여행 이후의 삶이 붕 뜨면서 그야말로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돼버렸다. 11살 연하인 애인이 사실상 변심한 것에 더 상처를 받은 것은 물론이다.

휴대전화 서비스를 확인하는 것은 혹시 애인이 마음을 고쳐먹고 전화하려는데 서비스가 불통이어서 통화가 안 되는 건지 아니면 서비스가 되는데도 전화를 안 거는 건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이 지나가는 미국은 외져서 휴대전화 서비스가 안 되는 지역이 많다. 그런데 그에게는 서비스가 되는 지역이 나오는 게 더 가슴이 아프다. 전화기가 안 울리는 시간이 견디기 어렵다.

더는 보조를 못맞추겠다, 에라

실연한 53살의 남자에게 42살 남자가 해줄 말은 많지 않다. 기다려봐. 다른 여자가 생길 거야. 그렇게 말하기도 어렵다.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를 감안하면 혹시 모른다. 근사한 여자친구가 나타날지도. 내가 해줄 수 있는 얘기는 스콧 시티에 있는 호스텔에 가면 끝내주는 여자(hot girl)가 일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정보제공에 고마워하기는커녕 “너는 결혼한 몸인데, 왜 그런데 관심을 두고 있느냐”고 힐문하듯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이제 자유의 몸이지만 말이야” 하고 덧붙였다. 실연을 당한 와중에서도 잠재적인 애인후보에 대한 문단속부터 한다.

엘도라도(Eldorado)에서 점심을 같이 먹은 뒤로는 선두를 빼앗아 먼저 달렸다. 그가 따라오는지 돌아볼 때마다 그는 점점 까만 점으로 사라진다. 한참을 기다리니까 그는 숨을 헐떡이며 도착해서는 좀 쉬었다 가자고 한다. 가게에서 그는 한번에 다 먹지도 못할 물과 먹을 것을 사서 안 그래도 무거운 짐을 더욱 무겁게 했다. 나이가 들면 되새길 추억만으로도 짐스러운 판인데….

나는 더 이상 그와 보조를 맞추기가 어려워서 갈림길이 나오면 멈춰 기다리겠다며 뒤를 안 보고 달렸다. 폭풍의 계곡이 끝난 대평원에서는 이마를 간질일 정도로만 바람이 분다. 페달을 밟아 피를 온몸으로 뿜어내니 충만감이 몸 구석구석 퍼진다. 시속 40㎞로 내처 달려 뉴턴(Newton)으로 들어가는 갈림길에서 멈췄다. 고속도로 다리 밑에 드러누웠다. 그는 안 보인다.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가 올 때까지 시간을 많이 벌어놓은 듯한 느낌이다. 이렇게 한 세상 살다 가는 거지 뭐. 두 다리를 들어올려 교각에 붙여놓고 지워진 노래 한 곡을 복원했다.

홍은택/〈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hongdongzi@naver.com
“저 하늘에 구름 따라 흐르는 강물을 따라/ 정처 없이 걷고만 싶구나 바람을 벗 삼아 가며/ 눈앞에 보이는 옛추억/ 아 그리워라/ 소나기 퍼붓는 거리를 나 홀로 걸으면/그리운 부모 형제 다정한 옛 친구/ 그러나 갈 수 없는 신세/ 홀로 가슴 태우다 흙 속으로 묻혀갈 내 인생아”

그는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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