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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01 22:08 수정 : 2006.01.18 16:17

캔자스 주 네스 시티에 있는 시립공원에서 야영을 했는데 리틀 야구 경기가 열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들었다. 꼬마 아이들한테는 내 자전거를 줄줄이 태워줘야 했다.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29)

여행하면서 되도록 야영하고 싶어했는데 며칠 동안 그렇게 하질 못해 좀이 쑤셨다. 오늘은 반드시 해야지 하고 찾은 곳이 캔자스 주 네스 시티(Ness City) 외곽에 있는 시립공원. 역시 야영하는 사람은 나 말고 아무도 없다.

이 도시는 지금까지 지나온 캔자스 주의 어떤 도시보다 인심이 고약했다. 시립 도서관 사서는 인터넷 사용에 관한 서약서에 서명하도록 요구하고 운전면허증으로 이름을 대조했다. 그리고 나서 인터넷 사용 일지에 다시 이름을 기재하라고 했다. 두 대밖에 없는 컴퓨터에는 지나치게 엄격한 3중 보안절차다. 데릭 인이라는 여관에 딸린 식당의 아줌마는 내가 밖에 세워둔 자전거를 볼 수 있도록 블라인드를 조금 열어놓자 사정없이 닫아버렸다. 내가 다시 열면서 자전거를 지켜보기 위한 것이고 식사 끝내면 블라인드를 다시 닫아놓겠다 했더니 “아무도 네 자전거를 가져가지 않아” 라고 쏘아붙였다. 샌드위치를 시켰더니 흰 식빵 두 쪽에 달랑 치즈 한 장과 소고기 한 조각을 넣어가지고 왔다. 아마 교통의 요충지여서 외지인들의 왕래가 많은 탓에 인심이 험해진 것 같다.

일찍 저녁을 챙겨먹고 잠 들 채비를 갖추는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하필이면 공원 야구 경기장에서 리틀 야구 야간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것 같다.

동네 꼬마들 자전거 시승

텐트 안에 들어가 누워서 책을 읽는데 크레이그라는 이름의 4학년짜리 소년이 다가와서 텐트의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질문을 던진다. 서로 얼굴은 안 보인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자전거를 타느냐. 힘드냐. 조금 있다가 다시 와서, 어디서 왔느냐. 한국이라고 하니까, 그래서 니가 하는 말이 우리가 하는 말하고는 달리 이상했구나. 한국말 해봐라. 안녕하세요. 그가 말을 붙이니까 친구들이 몰려들어서 한껏 호기심을 충족시킨다. 하루에 얼마나 자전거를 타느냐. 친구는 없느냐. 마치 내외를 하듯 텐트의 천을 사이에 둔 집단 인터뷰는 꽤 오래 진행됐다. 크레이그는 결국 본심을 토했다. 네 자전거 한번 타 볼 수 있느냐. 할 수 없이 텐트에서 나왔다. 크레이그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크레이그에 이어 마이크, 마이크에 이어 매트, 매트에 이어 매릴린… 내 자전거를 타보려고 동네 아이들이 줄을 늘어섰다.

야구 첫 경기는 둘 다 빨간 색 유니폼 상의를 입은 팀들의 경기인데 그 전에 있었던 1차전에서 패배한 팀들끼리의 대결. 경기가 마지막 회인 7회 말에 7 대 6으로 뒤집혔다. 회색 바지 팀이 흰색 바지 팀에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자 사람들이 환호하고 자동차 경적을 울리고 난리가 났다.


숨을 헉헉대며 달려본 게 언젠가
이제 몸이 나를 끌고 가려 한다
정신 1과 몸 3의 칵테일
자전거는 휘휘 섞는 셰이커
나는 움직인다 고로 존재한다

그렇게 소란스럽다가 밤 10시가 되니까 민방위 훈련하는 것처럼 소등하고 일제히 귀가했다. 나도 책을 덮고 잠을 청했으나 잠이 안 왔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여전히 귀에 쟁쟁한데 주위는 시커먼 정적이다. 그 대조가 신경을 갈았다. 그리고 밤 12시께 자동차 전조등이 내 텐트를 정면으로 쏘았다. 각오하던 순간이 왔다. 나는 항상 혼자 텐트를 치면서 한번은 나쁜 일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해왔다. 이 순간에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나도 모르겠다.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텐트 밖으로 나왔다. 자전거로 가서 개 스프레이를 손에 쥐었다. 불빛은 30m쯤 떨어진 주차장에서 발사되고 있었다. 광원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데 “디니” “디니”하는 외치는 소리가 나더니 불빛이 꺼지고 차가 사라졌다. 아마 잃어버린 개를 찾아 헤매는 가족이었던 것 같다.

휴우, 오늘도 무사히 하루가 지나가는군. 하늘엔 별빛들이 총총하다. 내 텐트를 바라본다. 큰 모기같이 생겼다. 앞이 모기눈알처럼 크고 몸이 길쭉하다. 처음엔 텐트 안이 너무 좁아서 몸을 구겨 넣느라 발에 쥐가 났다. 1.4㎏의 초경량인 대신 면적이 0.6평밖에 안 된다. 감옥의 독방도 이보다 좁지는 않을 것이다. 텐트 속에서가 아니라 텐트처럼 생긴 헐렁한 옷을 입고 잔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텐트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겸손한 집이다. 텐트 안 치고 슬리핑 백 속에 들어가 자는 사람도, 슬리핑 백 밖으로 내 민 얼굴이 모기들의 구내식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머리만 가릴 수 있는, 삿갓만한, 작은 모기장만 쓰고 자는 사람도 봤다. 하지만 그들은 '집'에서 자는 것은 아니다. 집이 되려면 최소한 지붕과 기둥이 있어야 한다. 내 텐트는 하늘을 찌르지 않으려는 듯 둥그렇게 휘어진 두 기둥이 받치고 있다. 지붕 천은 얇아서 만약 하늘에 있는 누군가가 귀엣말로 메시지를 속삭인다고 해도 놓치지 않을 것 같다.

길다란 칠각형인 텐트를 고정시키기 위해 일곱 개의 말뚝을 대지에 꽂는다. 땅을 파고 심을 박아 넣는 게 아니라 대지에 상처를 내지 않도록, 하룻밤만 버틸 수 있는 강도와 심도로, 침을 놓듯 예민하게 말뚝을 찌른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텐트의 아래쪽, 그러니까 발바닥 쪽을 먼저 놓는다. 바람은 발가락 사이를 스치고 올라와 목을 간질이고 얼굴을 쓰다듬는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머리부터 놓으면 머리는 높고 커서 바람의 길을 막아버린다. 굳이 바람이 없어도 좋다. 공기가 흐르는 것을 몸으로 느낀다. 기온 차가 심해서 새벽에는 슬리핑 백 안으로 기어들어가지만 대기와 체온의 변화가 동조하는 게 좋다. 그래서 웬만하면 텐트 위에 플라이를 치지 않는다.

동진하는 두 쌍의 대학생 라이더. 마일스(왼쪽)와 줄리언, 그리고 채드(오른쪽)와 리즈. 두 쌍은 나와 거의 같은 시기에 정반대 방향에서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이 중반을 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들은 오리건 주에서 버지니아 주로 간다.
같은날 반대쪽 출발 라이더 만나

무엇보다 바닥이 중요하다. 슬리핑 패드를 버지니아 주에 두고 온 뒤로 바닥에 뾰족한 나뭇가지나 돌이 없는지 깐깐하게 살핀다. 바닥은 마루다. 짙은 풀밭에 누우면 마치 마루에 융단을 깔고 누운 것 같다. 이 마루는 아침이면 촉촉히 젖는다. 그 과정이 서서히 일어나기 때문에 등이 축축해져도 불쾌하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면 텐트 안에는 구슬과 같은 물방울들이 맺혀 있다. 대기와 대지가 한밤에 겪는 변화를 함께 한다.

만약 기라는 게 있다면, 그리고 그걸 체득할 줄 안다면 우주의 기운을 빨아들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앨리슨이 골든 시티 호스텔의 냉장고에 붙여놓은 메모에서 썼듯이, 나는 우주의 질서를 훼방하지 않는 돌이나 나무와 같은 존재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야영을 하면 잠도 일찍 깨고 몸도 찌뿌듯하지 않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원뿔형 천막인 티피에서 자면 이런 기분이 들 것 같다. 반면 공기의 흐름이 차단된 여관에 들어가면 답답하고 한없이 몸이 꺼진다. 일어나질 못한다. 야생과 온실에서 재배한 채소의 차이다.

기분 좋게 야영하고 일어나 스콧 시티(Scott City)로 향했다. ‘끝내주는 여자(hot girl)’가 일하고 있다는 호스텔이 있는 그 스콧 시티다. 가는 길에 심한 바람을 맞으며 30년 전 이 구간을 비행기를 타고 건넜던 두 저널리스트가 생각 났다. 딕 도거티(Dick Dougherty)와 허먼 아크(Herman Auch) 두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가다 사이 히긴스(Cy Higgins)라는 마을 유지를 만나 농경용 비행기를 얻어 타고 콜로라도 주까지 넘어갔다. 180㎞의 거리를 번 것은 둘째 치고 2100m 상공에서 내려다 보는 대평원은 분명 달랐을 것이다. 그런 횡재가 내게는 일어나지 않았다.

동진하는 두 쌍을 차례로 만났다. 대학생들인 마일스와 줄리언은 5월22일 오리건 주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역시 대학생들인 채드와 리즈는 나와 같은 날인 5월26일 오리건 주에서 출발했다. 그럼 이제 여행의 중반을 넘어서는 셈이다. 그건 기분 좋은 일이지만 앞으로도 45일 정도가 남아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조금 일찍 여행을 끝내고 아들이 개학하기 전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안 될 것 같다.

모처럼 야영했다
공기 흐름을 몸이 느낀다
나는 우주의 질서를 따르는
돌이나 나무
아, 잘잤다 개운하다

스콧 시티 애슬렉틱 클럽의 호스텔은 생각보다 못했다. 끝내주는 여자도 보이지 않았다. 카운터에서 일하는 아줌마를 유심히 쳐다봤다. 설마 이 아줌마를 두고 한 얘기는 아니겠지. 이 아줌마한테 핫걸이 어디 있느냐고 거의 물어볼 뻔했다. 핫걸이 있다고 한 것은 동료 라이더지, 호스텔이 아니다. 12달러76센트를 내면 이 클럽의 하루 회원권을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수영장과 자쿠지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수영복은 이미 집에 보냈기 때문에 농구복을 입고 수영해도 괜찮으냐고 했더니 아줌마는 일언지하에 안 된다고 했다. 그럼 하루 회원권을 살 이유가 더욱 더 없어진다. 그런데도 이 회원권을 팔았다. 확실히 끝내주지 않는다.

스콧시티 핫걸은 어디 갔나

방도 따로 없고 체육관 옆에 딸린 작은 응접실에 슬리핑 백을 깔고 자야 한다. 라켓볼 룸에 딸린 응접실은 창문이 없어 답답하다. 저녁이 되니 아줌만지 ‘끝내주는 여자’인지도 퇴근하고 스포츠 클럽에 나 혼자 남았다. 왠지 무료했다. 빨아서 말리고 있던 농구복을 도로 입고 수영장으로 갔다. 개 한 마리가 지키고 있다. 그도 수영을 이미 한 듯 몸이 흠뻑 젖었다. 노을을 받아 보랏빛과 분홍빛으로 출렁이는 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척척 몸에 감기는 물을 느릿느릿 밀어내거나 잡아당기면서 수영장을 맴돌았다.

평소 같으면 이렇게 호젓한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왠지 불만스럽다. 지나쳐간 두 커플을 보고 시샘이 났나. 그것보다는 사실 충분히 달려주질 못한 탓인 것 같다. 바람을 핑계로 이틀 동안 160㎞밖에 달리지 않았다. 숨을 헉헉 내뱉도록 달려본 게 너무 오래 전인 것 같다. 이제 몸은 일정한 수준 이상 달리지 않으면 무력감을 느낀다. 갑갑해진다. 앙탈을 부린다.

불과 몇 주 전까지도 몸이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아서 힘들어했는데 이제는 몸이 나를 끌고 가려고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움직인다 고로 존재한다로 바뀌어가고 있다. 그 전부터 나는 내 몸을 손님처럼 잘 모셔야 할 별도의 존재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몸이 점차 주인이 되고 그 전에 나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던 정신이 몸의 지시를 따라간다. 이번 여행의 주제가 몸의 발견으로 변해간다.

홍은택/〈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hongdongzi@naver.com
원래부터 몸과 정신이 분리된 두 개의 실체가 아니라 움직임을 통해 합쳐지는 자기의 두 가지 질료인지도 모른다. 마치 바텐더가 보드카와 오렌지 주스를 1 대 3의 비율로 쉐이커(shaker)에 넣고 흔들면 스크루 드라이버라는 칵테일이 되는 것 과 같다. 나는 이제 정신이 1이면 몸이 3인 칵테일이다. 자전거는 그 둘을 세게 뒤섞는 쉐이커다. 내일은 캔자스 주를 넘어서 콜로라도의 이즈(Eads)까지 흔들어보자. 170㎞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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