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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0여만 명의 아담하고 아름다운 도시 푸에블로. 도시 한복판을 흐르는 아칸사스 강변에는 큰 벽화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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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32)
여행이란 때로는 놀라운 선물을 선사한다. 그것이 내겐 3700㎞의 외진 길을 달려온 끝에 초밥과 정종으로 나타났다. 푸에블로로 가는 길에 계속 부정적인 생각만 따라와 괴로웠는데 한방에 분위기가 역전됐다.
록키 산맥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푸에블로를 베이스 캠프로 정했다. 본격 등정에 앞서 거기서 체력과 영양을 보충하기로 했다. 그래서 하루 거리로는 좀 짧은 96㎞만 달렸는데 푸에블로 시내에 들어와 길을 잃어버렸다. 그러다 우연히 모모라는 일식집 간판을 발견하고 식욕이 동했다. 점심 때였다. 한식집이면 금상첨화겠지만 일식집도 웬 떡인가.
첫눈에 한국인이 하는 일식집이라는 것을 알았다. 스탠드에 붙은 주방에서 회를 썰고 있는 주방장 아저씨는 애써 흰색 바탕에 검은 줄 무늬의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한국인임을 속이지 못했다. 노란 셔츠에 검정 팬츠의 사이클복을 입은 국적불명의 손님이 들어와 “한국 사람이죠?”라고 대뜸 한국말로 물으니 주방장은 같은 한국 사람을 만나 반갑기 이전에 김이 샌 표정을 지었다. 한눈에 간파당하다니…. 그게 자신의 눈매 때문인지는 모르고….
‘로키’ 고지 등정을 앞두고
푸에블로를 베이스캠프로 삼았다
시내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일식집 발견, 이게 웬 떡인가
게다가 주방장은 고교1년 선배라니!
창가에 앉아 우동을 시키고 공기밥을 말아서 후르륵 후르륵 집어넣고 있는데 이번엔 주인 아저씨가 앞 자리로 와 앉았다. 박남준씨로 의정부에서 살다가 5년 전에 이민 와 비교적 빨리 미국에 정착했다. 통성명을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돈도 안 받겠다는 걸 우겨서 냈다. 그래야 저녁에 다시 올 수 있으니까.
날카로운 눈매 한눈에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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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칸소 강에서 316m 위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현수교를 건너고 있는 나. 콜로라도 주 로열 고지를 가로지르는 이 다리 주변은 관광지여서 나는 숱한 관광객들의 눈 요기거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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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식당을 들어가자마자 주인 아저씨는 주방장과 마주보는 스탠드로 와서 앉을 것을 권했다. 자리를 앉자마자 주방장을 모르느냐고 물었다. 점심 때 한번 마주친 것 외에 알 길이 전혀 없는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감. 한 눈매 하는 주방장이 칼을 들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어 모른다는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한국에서 날리던 사람인감. 시간을 끌다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하니까 주인은 가만 있는데 주방장이 그 말을 낚아채며 “날 몰라?”하고 반말로 나왔다.
지금까지 잘 봉변을 피해왔는데 동족인 한국 사람들을 만나 당하는구나 긴장하는 순간, “몇 회야?” 라고 물었다. 뭘 몇 회라고 하는 건가. 일식집이니까 회를 몇 접시 시키겠느냐는 뜻인감.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려보니 학교 얘기다. “고등학교요?” “응” 계속 반말이다. “중경 말이에요?” 그는 거기서 못 참겠다는 듯이 “나 십 회야” 라고 말했다. “예에?” “그런데 날 몰라?” “그게 저, 하도 오래 전이라서…”
저 칼 들고 해할 의도는 없구나 안도하면서 이렇게 기막힌 일이 있을까 싶었다. 내가 나온 중경고교는 학생수가 그렇게 많지 않은 학교다. 난 11회로 주방장은 1년 선배였다. 학교 다닐 때 선도부장인지 지도부장인지를 해서 교문 앞에서 부원들을 이끌고 서서 복장과 두발을 단속하던 선배였다. 가만 눈매를 살펴보니 언젠가 민방위훈련일에 교련복을 안 입고 와서 걸린 기억이 살아났다. 그 때도 저 눈을 부라리며 흰 장갑을 낀 두 주먹으로 내 가슴을 쳤다. 그 구타가 이 선배와의 유일무이한 접촉이었던 것 같다. 그 뒤 25년 만에 미국의 산간 소도시에서 주방장과 백수 라이더로 마주쳤으니….
선배 배윤식씨는 아버지의 광산업을 맡아서 하다가 사업에 실패하고 도미, 초야에 묻혀 살고 있었다. 부인 문정자씨도 고교 동창으로 지도부원이었다.
이 식당에서 첫 식사는 창가 테이블에서의 우동이었으나 두 번 째 식사인 저녁에는 스탠드에서 선배가 말아주는 초밥과 캘리포니아 롤, 다른 요리사 아저씨가 썰어서 밀어 준 회 한 사라를 주인아저씨가 따라주는 정종 반주로 먹었다. (자전거 여행뿐 아니라 미국에 공부하러 와서 이런 성찬을 누린 적이 없다.) 세 번째 식사인 다음날 아침에는 주방 안에서 라면을 함께 먹었다. 그리고 점심을 건너 뛰고 네 번 째 식사였던 저녁은 주인 아저씨가 댁으로 초대했다. 끼니마다 점점 더 깊이 더 들어간다. 테이블에서 스탠드, 스탠드에서 주방, 주방에서 주인집 식탁. 저녁 식사는 삼계탕과 소주. 소주를 너무 많이 마셔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 그래도 좋았다.
기력 바닥 요깃거리도 바닥
윤식이형은 줄담배였다. 우리는 간단히 각자 지나온 삶을 발제하고 인생에 대한 얘기를 새벽까지 나눴다. 부도까지 날 정도 쫄딱 망했지만 실의에 잠겨 있지 않고 언제 일식 요리를 배워 사시미 칼을 쥐고 일어나 자식 네 명을 키우고 있는 그는 단단한 사람이다. 눈매는 아직 죽지 않았다. 자전거여행을 인생의 하프타임이라고 한 내 말을 받아 “그래, 우리, 아직 후반전이 남아 있잖아” 라고 말했다. 그나 나나 아직 40대 초반일 뿐이다.
나는 주인 댁 아드님의 침대에서 잠을 자고 록키 산맥으로 떠날 채비를 갖췄다. 아침 식당에 들러 자전거를 찾았다. 윤식이형은 내게 봉투를 내밀었다. 차비라고 한다. 자전거를 타는데 무슨 차비가 드느냐고 했지만 한사코 받으라고 해서 여비로 받았다. 이건 순 한국식이다 하면서도 마음이 찡했다. 내가 줄 게 없어 미안했다. 그래도 괜찮을 거다. 윤식이형은 잘 될 테니까.
출발하자마자 뒷바퀴와 짐수레를 연결하는 스큐어(Skewer)가 빠져버리고 손잡이가 떨어져 나가는 고장이 발생했다. 지금까지는 큰 고장 없이 왔는데 주행거리 4천㎞에 가까워오자 자전거가 슬슬 탈을 부릴 태세다. 그 동안 내가 자전거에 대해 얼마나 친숙해졌는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길가에서 임시로 고쳐서 근처 자전거포로 끌고 갔더니 말끔히 손봐줬다. 돈도 안 받았다. 앞으로 고장 나도 이렇게 자전거포 옆에서 나야 할 텐데.
푸에블로에서는 멀리 록키 산맥이 눈에 들어온다. 그다지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온 몸에 무거운 햇살을 받으며 캐년 시티(Canon City)를 거쳐 로열 고지(Royal Gorge)까지 직행했다. 캐년 시티의 캐년은 철자가 Canon이지만 캐논이 아니라 캐년으로 발음한다. 원래 협곡이라는 뜻의 Canyon을 쓰려고 했으나 틀리게 쓴 철자가 굳어졌다. 그렇게 틀리게 쓴 철자를 보고 옳게 발음하라니, 미국 지명을 제대로 발음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로열 고지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계곡 현수교가 있다. 아칸사스 강에서 수직으로 316m 위에 놓인 다리다. 그 위를 자전거로 달려보고 싶은 욕심에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을 벗어나 꾸역꾸역 올라갔다. 이 다리에는 놀이공원이 있어서 관광객들로 붐볐다. 관광객들은 여기까지 자전거로 올라오다니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다리 위에서 바라 본 록키 산자락에는 한 여름에 눈이 덮여 있다.
로열 고지 일대는 관광지여서 텐트를 치는 데 24달러나 달라고 해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요기 베어라는 캠프장에 가서 일박했다. 척박한 땅이어서 그늘을 드리울 만한 나무도 없다. 말라 비틀어진 소나무밖에 없다. 남녀들이 야영한 곳을 피해 외진 곳에 텐트를 쳤다. 해가 저물자 텐트의 얇은 천 위로 달빛이 은은히 비춘다. 바람이 얼굴에 남아 있던 대낮의 잔열을 불어 가버리고 대지는 부드럽게 내 등을 받쳐주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에서 가장 높은 3462m의 고지를 앞에 두고 있어 긴장한 탓일 게다.
다음 날 중간 기착지인 하트셀(Hartsel)을 향해서 출발했다. 하루에 1천m 이상 올라가야 하는 강행군이다. 쉽지 않은 도전인 게 비단 오르막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몸이 받아들이는 산소의 20%는 뇌로 간다. 그래야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데 높은 산에 갑자기 올라가면 산소 흡입량이 줄어들고 뇌에 적정한 양의 산소를 배정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뇌의 지시를 받는 신체의 각종 기능이 혼선을 일으킨다. 머리가 무겁고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은 고산병의 첫 번째 증세다. 높은 산에 올라갈 때 시간을 두고 천천히 올라가는 것은, 올라갈수록 줄어드는 산소의 흡입량에 몸이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다.
나홀로 여성 라이더 만나
그런데 나는 푸에블로에서 출발한 지 불과 사흘 만에 후지어 패스를 등정할 계획을 세우고 밀어붙이고 있다. 역시 무리였나 보다. 입술이 바짝바짝 탄다. 수통에 든 물은 직사광선에 데워져 미적지근하고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다. 아침에 과자 한 조각 먹었는데도 점심 때가 되도록 허기를 느끼지 못한다. 속도는 구간구간 시속 5㎞대로 떨어졌다. 평지에서 걷는 속도와 큰 차이가 없다. 구피(Guffey)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했으나 트레일에서 1.6㎞ 가량 벗어나 있어 거리가 부담스러웠다. 그냥 내처 올라갔다. 역시 뇌의 기능 혼선에 따른 판단 착오다. 기력이 떨어져 가는데 요기할 거리가 바닥났다. 물도 떨어졌다. 가게는 전혀 없고 가끔 민가가 있었지만 철조망과 대문에 붙은 ‘침입금지’라는 간판에 선뜻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미국 산간 소도시에서 놀라운 만남
3700km 달린 괴로움 싸악
초밥-정종, 삼계탕-소주
최고 성찬으로 포식
여비까지 챙겨준다 찡하다
낑낑대고 오르막길을 올라가는데 여자 라이더 한 사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여자 단독 라이딩은 처음 봤다. 그가 내 차선 쪽으로 건너왔다. 영국 뉴캐슬에서 금융회사의 행정 직원으로 일하는 ‘방년’ 40살의 캐롤린 사우스(Carolyn South). 특별휴가를 내서 미국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하고 있는 중이다. 5월 중순 오리건에서 출발했으니 꽤 천천히 가는 편. 그는 사람들과 만나서 얘기를 하다 보니 진도가 안 나갔다면서 하루에 65㎞ 가량 달린다고 했다.
영국을 종단한 경험이 있는데 그 때는 지원차량도 따라붙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여행했기 때문에 단독 장거리 라이딩은 처음이라고 한다. 지금까지는 혼자 여행하는 게 뿌듯하다고 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의 의지로, 스스로의 규율로 이 고단한 여행을 이겨내는 게 가장 소중한 경험이라고 했다. 그리고 여자가 혼자 여행하고 영국 액센트를 구사하는 게 여행에서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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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택/〈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hongdongz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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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도와주고 싶어서 몸살을 앓는다는 것.
그것은 내가 여행하다가 한국 사람을 만나면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차이는 이곳에는 한국 사람은 거의 없고 어디 가나 앵글로 색슨의 천지라는 것. 그는 더 얘기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나는 너무 목이 말라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상쾌한 내리막길이 내게는 고통스런 오르막길이다. 그에게 물을 달라고 했으면 기꺼이 수통째 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알량한 자존심은 남아가지고…. 다시 자전거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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