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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오밍 주 롤링스에 있는 타이 식당에서 만난 컨티넨탈 디바이드 트레일 종주 하이커 5명. 왼쪽부터 토드 브래들리, 가브리엘 콜커, 브레트 윌킨슨, 제이슨 포토 존 일리그. 종주까지 3분의 1 정도를 남겨놓은 이들에게는 자신감과 팀웍이 넘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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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36)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오늘 하루 풍성한 기록들을 양산했다. 일곱 번째 주로, 미국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주(49만명)인 와이오밍 주에 진입했고 처음으로 지도 5쪽을 넘겼고 하루 최장 거리인 176㎞를 달렸다.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한번 몸을 쓰기 시작하면, 그래서 몸이 움직이는데 익숙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몸이 나를 끌고 다닌다. 그래서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69살이 돼도 몸 쓰기를 멈출 수 없는 베브처럼. 콜로라도 주 월든부터 와이오밍 주 롤링스(Rawlings)까지는 해발고도 2460m에서 2070m까지 완만히 400m를 내려가는 길. 그러나 월든에서 140㎞ 지점에 있는 월코트(Walcott)까지는 옆 바람, 월코트에서 롤링스까지는 맞바람이 강하게 불어 오르막길 못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 36㎞ 구간에는 강풍 주의보 표지판까지 세워져 있었다. 처음으로 선글라스에 뒷거울을 달고 달렸다. 이 거울은 칩과 캐티 부부가 선물로 준 것이다. 이 부부는 장비를 안 갖춘 게 없었다. 가장 인상적인 장비는 데이저(Dazer)라는 초음파 발사 총이었다. 이 총을 발사하면 사람들은 들을 수 없고 개들만 들을 수 있는 초음파가 나와서 송아지만한 개도 퇴치할 수 있다고 한다. 캐티는 내가 그토록 개들한테 시달린 캔터키 주를 오히려 이 총을 쏘는 재미에 흠뻑 빠져 통과했다고 한다. 4만원 정도 하니까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다. 캔터키 개의 추격에 횡단여행을 중단한 전력이 있는 데이비드도 이런 무기가 있는 줄 모르고 치한 퇴치용 스프레이를 뿌리고 다녔으니…. 지독한 강풍에 자갈길
고속도로에선 화물차 빵빵 텃세
악조건에도 하루 지도 5쪽 176km 신기록
몸이 나를 끌고 간다
몸의 구속에서 자유로워지고 있다 이 부부는 뒷거울도 여벌로 가져와 내게 줬다. 나는 뒷거울의 각도를 맞춰서 뒤를 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아 집에 놓고 왔었다. 뒤를 보려고 우물쭈물하는 동안 균형을 잃어 앞에서 오는 차에 당할 수 있다. 하지만 장거리 라이더들 사이에서는 필수 장비다. 그 동안 나는 거울 대신 귀를 쫑긋 세워 뒤에서 오는 차들을 느껴왔다. 이제는 굉음만 듣고 대충 어떤 차가 지나갈지 짐작할 정도가 됐다. 이대로 미국 횡단을 계속한다면 서부에 도착할 즈음에는 용불용설에 따라 코끼리의 귀만큼은 커질 것이다.
뒷거울 장착하니 굉음 사라지네 그래도 실험해보기로 했다. 뒷거울은 선글라스 왼쪽 테에 부착되기 때문에 왼쪽 눈에서 전방으로 45도 각도에 거울이 있다. 꼭 맹점 같다. 대신 뒤의 전망이 열렸다. 처음엔 각도가 잘 안 맞아 뒤에서 오는 차들을 몇 번 놓쳤지만 차츰 익숙해졌다. 왼쪽 눈만으로 곁눈질해서 보는 것이어서 귀는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대신 사시가 되지는 않을까.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내가 끔찍하게도 싫어했던 굉음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눈으로 보게 되니까 귀가 작동하지 않는다. 오늘 세운 마지막 기록은 처음으로 인터스테이트라고 불리는 주간 고속도로를 달렸다는 것. 자청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 주행한 176㎞ 중 20㎞는 다른 길이 없었다. 보통 주간 고속도로에서 자전거 주행이 불법이지만 길이 발달하지 않은 미국 북서부에서는 간간이 허용한다. 물론 갓길을 달리지만 그래도 쉴새 없이 그것도 시속 120㎞로 쌩쌩 지나가는 화물차들에게 담력을 시험받는다. 화물차들은 고막을 찢어놓는 경적으로 자신들의 텃밭을 침범한데 대해 화를 냈다. 자식들아, 나도 빨리 빠져나가고 싶다. 지독한 강풍 때문에 마음만 급하다. 거대한 정유공장이 있는 싱클레어(Sinclair)를 만나 주간 고속도로에서 빠져나가 주도인 76번으로 접어들었는데 바로 후회했다. 이 길은 말이 포장도로지, 표면이 자갈들이 박힌 깨강정 같았다. 맞바람에다 마찰이 심한 노면으로 막판 15㎞가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졌다. 길 옆에 난 철길을 따라 퍼시픽 유니온 화물열차가 기적 소리조차 없이 석양을 향해 미끄러져 간다. 왠지 역사 속으로 퇴장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괜찮았다. 끄떡 없었다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그 강도의 운동을 큰 무리 없이 소화했다. 나는 물과 먹을 것만 주어지면 끝없이 달릴 수 있는 적토마가 된 것 같다. 38살에 수영을 처음 배워서 어느 날 2를 가게 됐고 며칠 뒤 50m, 그런 뒤 100m, 200m 그리고 500m, 나중에는 따뜻한 인도양의 몇 ㎞를 쉬지 않고 수영할 수 있었을 때 나는 물만 마시면 끝없이 수영할 수 있게 된 것과 똑 같은 이치다. 몸의 구속에서 자유로워지고 있는 것이다. 로링스에서 특별한 이들을 만났다. 점심 때 시내에 있는 아낭스 타이 식당에 갔다가 컨티넨탈 디바이드 트레일(Continental Divide Trail)을 종주하는 하이커 5명을 만났다. 캐나다, 미국, 멕시코 3국에 걸쳐 있는 컨티넬탈 디바이드 트레일은 전편에 베브와 제리가 종주하고 있는 길로 소개했는데 그것은 차도 다닐 수 있는 길이고 이들이 다니는 길은 산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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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오밍 주의 끝없는 대지에 ‘ㄱ’ 자로 꺾인 길을 달리는 한 라이더. 지형은 점점 더 헐벗어 사막으로 치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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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도전 뒤의 자신감 물씬 도회지에 와 들뜬 그들이 공짜영화를 보여줬는데… 그 동안 너무 혼자 오래 있었던 탓인지 그들의 팀웍이 부러우면서도 여러 사람과 함께 있는 게 불편해지기 시작해서 도서관 간다는 핑계로 먼저 나왔다. 그리고 저녁을 먹으러 타이 식당에 갔다가 이들과 다시 조우했다. 이들은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러 간다면서 같이 가자고 했다. 귀가 솔깃했다. 극장을 가본 지가 수세기 전 같다. 야영을 포기하고 그들이 묵고 있는 모텔에 체크인한 뒤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극장이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택시를 대절했는데 6명이 찡겨 타고 갔다. 존은 라이더에 대한 하이커들의 대접이라면서 영화를 공짜로 보여줬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영화가 문제였다. <찰리와 초코릿 공장>. 다 보고 나서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이런 법석을 떨었나 싶었다. 그런데 20대의 반응은 달랐다. 다시 대절한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 23살의 가브리엘이 감동 그 자체였다고 말을 꺼내자 20대의 다른 두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40대의 존이나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에둘러 말했다. 그랬더니 가브리엘은 이 영화의 오리지널을 봤으면 그 차이를 알 수 있고 훨씬 더 감동을 받았을 거라고 말했다. 과연 그랬을까. 20대와 40대 감성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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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택/〈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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