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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26 20:26 수정 : 2006.02.06 15:36

와이오밍 주 롤링스에 있는 타이 식당에서 만난 컨티넨탈 디바이드 트레일 종주 하이커 5명. 왼쪽부터 토드 브래들리, 가브리엘 콜커, 브레트 윌킨슨, 제이슨 포토 존 일리그. 종주까지 3분의 1 정도를 남겨놓은 이들에게는 자신감과 팀웍이 넘쳐났다.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36)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오늘 하루 풍성한 기록들을 양산했다. 일곱 번째 주로, 미국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주(49만명)인 와이오밍 주에 진입했고 처음으로 지도 5쪽을 넘겼고 하루 최장 거리인 176㎞를 달렸다.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한번 몸을 쓰기 시작하면, 그래서 몸이 움직이는데 익숙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몸이 나를 끌고 다닌다. 그래서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69살이 돼도 몸 쓰기를 멈출 수 없는 베브처럼.

콜로라도 주 월든부터 와이오밍 주 롤링스(Rawlings)까지는 해발고도 2460m에서 2070m까지 완만히 400m를 내려가는 길. 그러나 월든에서 140㎞ 지점에 있는 월코트(Walcott)까지는 옆 바람, 월코트에서 롤링스까지는 맞바람이 강하게 불어 오르막길 못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 36㎞ 구간에는 강풍 주의보 표지판까지 세워져 있었다.

처음으로 선글라스에 뒷거울을 달고 달렸다. 이 거울은 칩과 캐티 부부가 선물로 준 것이다. 이 부부는 장비를 안 갖춘 게 없었다. 가장 인상적인 장비는 데이저(Dazer)라는 초음파 발사 총이었다. 이 총을 발사하면 사람들은 들을 수 없고 개들만 들을 수 있는 초음파가 나와서 송아지만한 개도 퇴치할 수 있다고 한다. 캐티는 내가 그토록 개들한테 시달린 캔터키 주를 오히려 이 총을 쏘는 재미에 흠뻑 빠져 통과했다고 한다. 4만원 정도 하니까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다. 캔터키 개의 추격에 횡단여행을 중단한 전력이 있는 데이비드도 이런 무기가 있는 줄 모르고 치한 퇴치용 스프레이를 뿌리고 다녔으니….

지독한 강풍에 자갈길
고속도로에선 화물차 빵빵 텃세
악조건에도 하루 지도 5쪽 176km 신기록
몸이 나를 끌고 간다
몸의 구속에서 자유로워지고 있다

이 부부는 뒷거울도 여벌로 가져와 내게 줬다. 나는 뒷거울의 각도를 맞춰서 뒤를 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아 집에 놓고 왔었다. 뒤를 보려고 우물쭈물하는 동안 균형을 잃어 앞에서 오는 차에 당할 수 있다. 하지만 장거리 라이더들 사이에서는 필수 장비다. 그 동안 나는 거울 대신 귀를 쫑긋 세워 뒤에서 오는 차들을 느껴왔다. 이제는 굉음만 듣고 대충 어떤 차가 지나갈지 짐작할 정도가 됐다. 이대로 미국 횡단을 계속한다면 서부에 도착할 즈음에는 용불용설에 따라 코끼리의 귀만큼은 커질 것이다.


뒷거울 장착하니 굉음 사라지네

그래도 실험해보기로 했다. 뒷거울은 선글라스 왼쪽 테에 부착되기 때문에 왼쪽 눈에서 전방으로 45도 각도에 거울이 있다. 꼭 맹점 같다. 대신 뒤의 전망이 열렸다. 처음엔 각도가 잘 안 맞아 뒤에서 오는 차들을 몇 번 놓쳤지만 차츰 익숙해졌다. 왼쪽 눈만으로 곁눈질해서 보는 것이어서 귀는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대신 사시가 되지는 않을까.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내가 끔찍하게도 싫어했던 굉음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눈으로 보게 되니까 귀가 작동하지 않는다.

오늘 세운 마지막 기록은 처음으로 인터스테이트라고 불리는 주간 고속도로를 달렸다는 것. 자청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 주행한 176㎞ 중 20㎞는 다른 길이 없었다. 보통 주간 고속도로에서 자전거 주행이 불법이지만 길이 발달하지 않은 미국 북서부에서는 간간이 허용한다. 물론 갓길을 달리지만 그래도 쉴새 없이 그것도 시속 120㎞로 쌩쌩 지나가는 화물차들에게 담력을 시험받는다. 화물차들은 고막을 찢어놓는 경적으로 자신들의 텃밭을 침범한데 대해 화를 냈다. 자식들아, 나도 빨리 빠져나가고 싶다. 지독한 강풍 때문에 마음만 급하다.

거대한 정유공장이 있는 싱클레어(Sinclair)를 만나 주간 고속도로에서 빠져나가 주도인 76번으로 접어들었는데 바로 후회했다. 이 길은 말이 포장도로지, 표면이 자갈들이 박힌 깨강정 같았다. 맞바람에다 마찰이 심한 노면으로 막판 15㎞가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졌다. 길 옆에 난 철길을 따라 퍼시픽 유니온 화물열차가 기적 소리조차 없이 석양을 향해 미끄러져 간다. 왠지 역사 속으로 퇴장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괜찮았다. 끄떡 없었다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그 강도의 운동을 큰 무리 없이 소화했다. 나는 물과 먹을 것만 주어지면 끝없이 달릴 수 있는 적토마가 된 것 같다. 38살에 수영을 처음 배워서 어느 날 2를 가게 됐고 며칠 뒤 50m, 그런 뒤 100m, 200m 그리고 500m, 나중에는 따뜻한 인도양의 몇 ㎞를 쉬지 않고 수영할 수 있었을 때 나는 물만 마시면 끝없이 수영할 수 있게 된 것과 똑 같은 이치다. 몸의 구속에서 자유로워지고 있는 것이다.

로링스에서 특별한 이들을 만났다. 점심 때 시내에 있는 아낭스 타이 식당에 갔다가 컨티넨탈 디바이드 트레일(Continental Divide Trail)을 종주하는 하이커 5명을 만났다. 캐나다, 미국, 멕시코 3국에 걸쳐 있는 컨티넬탈 디바이드 트레일은 전편에 베브와 제리가 종주하고 있는 길로 소개했는데 그것은 차도 다닐 수 있는 길이고 이들이 다니는 길은 산길이다.

와이오밍 주의 끝없는 대지에 ‘ㄱ’ 자로 꺾인 길을 달리는 한 라이더. 지형은 점점 더 헐벗어 사막으로 치닫는다.
미국을 종단하는 등산코스는 이 트레일 말고 서부 해안을 따라 가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과 여행 초반에 소개한 바 있는 동부의 애팔래치언 트레일 등 모두 세 줄기가 있다. 이중에서 컨티넨탈이 가장 길고 가장 험한 코스다. 트레일로 다 연결돼 있지 않고 군데군데 끊겨 있어서 하이커들이 알아서 길을 만들어 가야 한다. 70% 정도 연결돼 있다고 한다. 중간에 사막 구간도 꽤 있다. 거리는 4300에서 5000㎞ 정도로 잡고 있다. 애팔래치언 트레일은 3360,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은 4300㎞다.

5000km 걸으며 국토 향한 존경심

그래서 컨티넨탈 종주 하이커는 많지 않다. 연간 50여명 정도. 남쪽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올라가는 등산의 경우 성공률이 극히 낮아 어느 해에는 단 한 명만이 종주에 성공했다고 한다. 그렇게 희소한 북진 하이커들을 5명이나 한꺼번에 만났다. 이들은 세 명이 원래 한 팀이고 도중에 두 명이 합류해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같이 움직인다고 해서 꼭 같이 걷는 것은 아니다. 대충 비슷한 시간대에 걷는다는 것일 뿐이다.

하이커들에게는 도회지가 각별하다. 이들도 마음이 들떠 있었다. 메인 주에 있는 베이츠 칼리지에서 스쿼시를 가르치는 강사 존 일리그(John Illig)는 이미 다른 두 트레일을 종주해서 책까지 두 권 내고 마지막으로 컨티넨탈에 도전하고 있는 중이다. 나와 동갑이다. 그는 어느 나라나 그 나라를 대표하는 종주 코스가 있다고 한다. 종주를 통해서 종교적 순례에 못지 않은 국토에 대한 존경을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 그게 바로 국토순례다. 한국에 백두대간이 있듯이. 세 종주 코스 중에서 존은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이 가장 좋다고 소개했다. 태평양 해변을 따라 시에라 산맥을 타고 가는 이 코스는 경치도 경치지만 모기가 없고 비도 오지 않으며 자동차 도로도 많이 나 있지 않아 원시림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것.

버지니아 주에서 온 23살의 가브리엘 콜커(Gabriel Colker)는 애팔래치언 트레일은 너무 사람들로 북적대서 이쪽 코스를 선택했다고 하는데 1년에 3000명 정도가 시도하는 애팔래치언 트레일도 3360㎞라는 길이와 출발시기가 각기 다른 점에 비춰볼 때 절대 붐빌 일이 없다. 하이커들의 셈법은 다른 모양이다. 하이커들은 닉네임들이 있다고 소개한 바 있는데 26살인 제이슨 포토(Jason Porto)는 포토가 포르노와 비슷해 포르노라고 불린다. 27살인 브레트 윌킨슨(Brett Wilkinson)은 환경잡지의 에디터 출신. 20대의 이 세 사람 모두 이번 종주를 위해 직장을 그만뒀다. 이들에게는 아침 9시까지 출근해서 5시까지 일하는 생활을 20, 30년씩 계속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경이롭다고 한다.

이들은 4월13일 멕시코 국경을 넘어갔다가 북상을 시작, 석 달 닷새 만에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 두 달을 더 걸으면 최종 목적지인 글래시어 국립공원까지 갈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다마스커스에 만난 애팔래치언 하이커들과는 달리 등반 경험도 많고 또 지금까지 석 달 이상 어려움을 딛고 온 탓인지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스스로 부여한 험한 도전을 이겨내고 났을 때 찾아오는 자신감과 여유가 흠뻑 느껴진다. 이들 얘기로는 첫 3주가 고비인데 컨티넨탈은 중간에 그만두고 싶어도 중간에 도로나 인가가 없는 산 속이어서 몇 일 더 걸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계속 걷게 된다고 말했다. 다섯 번 째 하이커인 토드 브래들리(Todd Bradley)와는 안타깝게도 얘기할 사이가 없었다.

연간 50명쯤만 도전하는 콘티넨털 종단 하이커를 5명이나 만났다
험한 도전 뒤의 자신감 물씬 도회지에 와 들뜬 그들이 공짜영화를 보여줬는데…

그 동안 너무 혼자 오래 있었던 탓인지 그들의 팀웍이 부러우면서도 여러 사람과 함께 있는 게 불편해지기 시작해서 도서관 간다는 핑계로 먼저 나왔다. 그리고 저녁을 먹으러 타이 식당에 갔다가 이들과 다시 조우했다. 이들은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러 간다면서 같이 가자고 했다. 귀가 솔깃했다. 극장을 가본 지가 수세기 전 같다. 야영을 포기하고 그들이 묵고 있는 모텔에 체크인한 뒤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극장이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택시를 대절했는데 6명이 찡겨 타고 갔다. 존은 라이더에 대한 하이커들의 대접이라면서 영화를 공짜로 보여줬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영화가 문제였다. <찰리와 초코릿 공장>. 다 보고 나서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이런 법석을 떨었나 싶었다. 그런데 20대의 반응은 달랐다. 다시 대절한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 23살의 가브리엘이 감동 그 자체였다고 말을 꺼내자 20대의 다른 두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40대의 존이나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에둘러 말했다. 그랬더니 가브리엘은 이 영화의 오리지널을 봤으면 그 차이를 알 수 있고 훨씬 더 감동을 받았을 거라고 말했다. 과연 그랬을까.

20대와 40대 감성은 달랐다

홍은택/〈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다음날은 보름이었다. 이들은 그레이트 디바이드 베이즌(Great Divide Basin)이라는 사막성 분지를 건널 예정이었다. 낮에는 무덥기 때문에 저녁까지 기다린다고 했다. 보름달이 떠올라 사막을 비출 때 출발한다. 같은 길을 가는 나는 북풍이 아침에는 잔잔하기 때문에 새벽 일찍 출발할 예정. 우리는 밤에 작별인사를 했다. 영화는 재미없었지만 으샤으샤 몰려다니는 기분이 좋긴 했는데….

달빛 아래 사막을 걷는 그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곧 지워질 발자국과 그보다 더 먼저 사라질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채 터벅터벅 걸을 것이다. 제이슨은 사막처럼 전망이 펼쳐진 곳을 걷는 게 무섭다고 말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앞이 보여서 꼭 좋은 것만은 아닌가 보다. 그걸 뻔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 고개를 푹 처박고 걸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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