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12.30 19:18
수정 : 2007.12.30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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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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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순칼럼
조그만 새해 달력을 하나 받았다. 지난달 말 강원도가 주는 디엠제트(비무장지대) 특별상을 받기 위해 내한했던 평화군축연구소 ‘피스데포’의 대표로 있는 우메바야시 히로미치가 준 것이다. 27년 전 평화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고자 도립대학 교직을 던지고 나온 그는 시민운동 차원의 군사연구 수준을 전문연구소급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달력 표지에는 ‘8월 하늘 아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작은 벚꽃 사진이 여럿 있었다. 자세히 보니 1945년 8월 히로시마 상공에서 원자폭탄이 터졌을 때 폭심지 인근에서 겨우 살아남은 ‘피폭 벚꽃’들이었다. 뒤표지 안쪽에는 국권 행사로서 전쟁을 영구히 포기하고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일본 헌법 9조와 비핵도시와 헌법 옹호를 주창하는 한 지자체의 선언 등이 일어와 영어로 된 예쁜 장식문자로 실렸다. 피스데포가 회원들에게 나눠줄 목적으로 만든 달력이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료 수집, 번역, 인쇄 등에 협조한 사람들과 기무라 유코(67)라는 제작 책임자의 이름이 연락처와 함께 실렸다.
사연을 알아보니 나라에 살고 있는 주부인 기무라가 1995년부터 ‘반전·비핵 달력’을 개인적으로 만들어 실비로 나눠주고 있다고 한다. 2008년도 달력이 13번째가 되는 셈이다. 그의 부친 기무라 모토하루는 원래 핵물리학자로, 원폭 투하 직후인 1945년 8월에서 10월까지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들어가 처음으로 피해조사를 했다. 기무라의 달력 제작은 1995년 미국 스미스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에서 열기로 기획했던 원폭전시회가 재향군인들의 반발로 중지되자 크게 낙담한 부친을 위로하고자 뭔가 의미 있는 일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그는 99년 총련계 민족학교인 오사카조선고교가 전국 고교 체전에 정식으로 출전자격을 얻게 되자 시민들의 헌금을 모아 응원용 펼침막을 기증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기무라가 달력에 일어와 영어를 병기하는 것은 세계를 향해 메시지를 발신하려는 의도일 터이다. 그것은 평화헌법과 모든 핵무기 폐기다. 일본의 보수진영에서 평화헌법을 무력화하고 핵무기 보유 논의에 관한 금기를 없애려는 책동이 되풀이되고 있지만, 양식 있는 일본인들은 평화헌법이 ‘인류 문화유산’으로 영구히 계승할 가치가 있다고 자랑할 만하다.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 한국인들이 세계를 무대로 발신할 수 있는 메시지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한겨레>가 선정한 올해 국내 10대 뉴스의 첫째 항목은 이명박 후보의 대통령 당선이다. 5년간 이 나라를 이끌 지도자를 뽑는 대선이나 이 당선자의 재산축적 과정 의혹과 도덕적 흠결 논란이 모든 것을 덮어 버렸다. 정책토론은 아예 사라지고 유권자들의 감흥을 일궈낼 소재도 없었다. 대선 막판에 일본의 한 신문은 “동아시아는 크게 움직이고 있다”며 “주변의 눈도 의식한 건설적 논쟁을 기대한다”고 주문했지만 이에 부응하는 논의는 역시 없었다.
이명박 당선자를 보좌할 인수위가 구성됐다. 면면을 보면 국제적으로 감동을 줄 만한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실용주의, 규제완화, 성장 우선주의 같은 구호로는 세계인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없을 것이다. 냉전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고 새로운 군확경쟁·패권구도가 펼쳐지는 이 지역에서 화해와 공동번영 방안과 이주노동자 등 보편적 인권문제에서 참신한 자세를 보여주지 않으면 새 정부에 쏠리는 관심은 머잖아 사그라질 것이다. 당선자 진영의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다.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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