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2.12 19:41
수정 : 2008.12.23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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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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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순칼럼
항일독립운동의 마지막 세대라 할 수 있는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영결식이 그제 ‘겨레장’으로 치러졌다. 일제 패망이 임박한 무렵 현재 서울시의회가 들어선 부민관에서 열린 친일파 모임에 폭탄을 던졌던 선생은 정부 수립 후에도 친일파가 득세해서 진정으로 해방된 것이 아니라며 정부 주최의 삼일절 광복절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인이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날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일본 여야 의원단을 만나 한-일 관계에서 과거사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방침을 다시 강조했다. 과거사에 매이면 오늘이 불행해진다는 이 당선인의 발언에서 역사의식의 큰 괴리를 느낀다. 과거청산에 지나치게 매달려서가 아니라 과거청산을 제대로 한 적이 없어서 문제가 계속 꼬였기 때문이다.
한-일 주류사회가 벌여온 친선·교류 관계의 모순을 상징하는 인물의 하나로 바바 요시미쓰를 들 수 있다. 한일의원연맹 일본 쪽 초대 사무총장을 지냈고 한일친선협회 한일문화교류기금 운영에도 관여했다. 1918년 식민지 조선의 진남포에서 태어나 평양중학교를 졸업했으니 한반도와 인연이 깊은 셈이다. 비밀공작·첩보 요원을 양성했던 육군나카노학교를 나와 관동군 정보부대의 간도지부에서 장교로 근무했다. 정보부대는 일본이 1차대전 끝무렵 러시아의 적군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구미 열강들과 함께 시베리아 출병을 했을 때 설치한 특무기관의 후신이다.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항일무장 세력을 소탕하고 소련과 연계된 스파이 용의자들을 적발하는 것이 간도지부의 주 임무다.
일제의 항복 선언 직전 대일 참전을 한 소련은 관동군 60만을 포로로 잡아 시베리아에서 강제 노역을 시켰다. 소련은 억류자들을 분류해서 단계적으로 귀국을 허용했으나, 전범 용의자나 정보기관 요원들에 대해서는 가혹한 처분을 했다. 마지막으로 풀려난 사람들은 일-소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1956년 말에야 귀국하는데 바바도 이 무리에 끼었다. 시베리아에서 엄청난 고생을 했던 바바의 인생은 귀국 후 옛 군대 연줄로 다시 풀리기 시작했다. 아시아의원연맹 등에 실무자로 관여하며 각국의 반공지도자들과 교분을 쌓았고 특히 한국인들과 관계가 좋았다고 한다. 비결은 만주시절의 인맥이다.
정보부대의 통제를 받는 부대 가운데 간도특설대가 있었다. 일본인 지휘관 밑에 조선인들로만 구성된 부대로 항일 무장세력 소탕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관동군 지휘부가 ‘상승부대’로 추켜올린 이 특설대는 조선인들 사이에 ‘둘쨋놈 군대’로 불렸다. “일본놈조차 감히 하지 못하는 나쁜 짓을 했다”는 증언들이 남아 있다.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신현준 김석범, 지리산전투사령관으로 활약한 김백일 장군이 특설대 출신이다. 한국전쟁 때 제임스 밴 플리트 8군 사령관이 ‘가장 우수한 한국군 장군’으로 높이 평가했던 백선엽 장군도 특설대에서 근무했다. 그는 육참총장 합참의장 교통부 장관까지 지냈다. 비단 특설대뿐만 아니라 일본군 만주군 출신 가운데 정부 수립 이후 요직을 차지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곧 출범할 이명박 정부는 과거사를 조사하는 기구들을 통폐합해서 몇 개만 상징적으로 남기고 정리해버린다고 한다. 해방 후 60여년이 지났어도 과거사 조사활동이 필요한 이유는 오랜 기간 수치스런 과거를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실용·효율 우선주의’에 빠져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을 또 흐지부지해버린다면 후대의 역사의식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숭례문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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