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4.13 19:46
수정 : 2008.12.23 17:14
|
김효순 대기자
|
김효순칼럼
미국의 언론인 돈 오버도퍼가 1997년에 낸 <두 개의 코리아>는 외국인이 한반도의 현대사를 다룬 책 가운데 수작의 하나로 꼽힌다. 오랜 기자 생활에서 쌓은 취재경험에다 현역에서 은퇴한 후 이 책을 쓰기 위해 수백회의 인터뷰를 했다고 하니 서술내용이 공허하지 않다. 그는 한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이승만을 제외하고는 다 만났다. 한 우물을 판 전문가라는 점이 작용했겠지만 오래 몸담았던 유력지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라는 직함이 더욱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언론에도 엄연히 서열이 있다. 60년대 초반 이래 미국의 역대 대통령이나 일본의 총리를 모두 만나 인터뷰를 한 한국인 기자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 했다.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올해 팔순을 맞아 낸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를 보며 광의의 기자가 아니면서 한국의 역대 대통령을 공식·비공식으로 숱하게 만난 언론 영역의 특수층이 있다는 점을 새삼 상기했다. 책의 전반적 흐름은 조선일보의 발행부수가 동아일보와 한국일보의 절반 수준에 그쳤던 60년대 초 경영 일선에 뛰어들어 보수 언론계의 ‘일등신문’으로 끌어올렸다는 내용의 회고담이다. 역대 대통령과의 식사 모임이나 골프하는 자리에서 벌어진 일화는 일반 사람들은 도저히 겪을 수 없는 일들이다.
조선일보가 60년대 언론윤리법 파동이나 몇 가지 필화사건에서 개인적으로 수모를 당하거나 당국의 탄압을 받았다는 점을 상당히 부각시킨 대목도 그런대로 읽을 만하다. 60년대 중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기사와 관련해 하도 트집을 잡아 은쟁반을 들고 그의 성북동집에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쟁반만 맡긴 채 돌아왔다. 73년 군부실세였던 윤필용 수도경비사 사령관이 전격 구속됐을 때는 보안사에 연행됐다. 윤필용이 수경사 산하 배구팀 운영을 지원해 달라고 해 신문사들로부터 돈을 거둬 전달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당시 수사관들은 취조 중 설렁탕을 먹다가 기침하는 척하면서 ‘밥알 세례’를 자신의 얼굴에 퍼부었다고 했다.
그는 언론 외길 55년을 걸어왔다며 스스로의 삶을 ‘신문인’으로 규정했다. 신문인이라는 희한한 용어에 담긴 모순은 75년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에 대한 기술에서 잘 드러난다. 폭압적 유신체제 하의 박정희 정권은 언론자유와 진실보도를 요구하는 동아일보 기자들의 투쟁이 계속되자,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가해 광고를 내지 못하도록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는 당시 조선일보 재정 사정으로는 열흘을 견디지 못했을 텐데 동아일보사가 광고탄압 압력을 석 달이나 버티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썼다.
사주 가문으로서 그의 우선순위는 언론의 정도가 아니라 신문사 수호다. 그러니 신군부의 반란 때 국보위에 참가한 것이 그다지 이상하지 않다. 세상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살벌한 때에 ‘나의 명예보다는 신문사의 안위가 먼저’였다는 것이다. 그는 70년대 중반 조선일보 기자들의 대량해고를 가져온 ‘3·6 사태’에 대해 여전히 마음의 멍에로 남아 있다고 말하면서도 기자들의 투쟁이 순수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사주를 받은 것처럼 묘사했다.
70~80년대 벌어졌던 야만의 극치를 급속한 산업화에 불가피한 통과의례 정도로 여기는 역사왜곡이나 허무주의가 만연되고 있는 시절이다. 국보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제대로 고해성사도 하지 않고 총리 등 고위직에 중용되고 있으니 허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심판은 마무리되지 않았다. 방우영씨가 두려워할 것은 아침이 아니라 역사의 기록이다.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