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5.27 19:42
수정 : 2008.12.23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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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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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순칼럼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로부터 ‘난감한’ 선물을 받았다. 모스크바에서 출간된 <코민테른과 조선>이라는 자료집이다. 색인 인명약전 등을 포함해서 81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러시아어로 돼 있어 상당한 러시아어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 무슨 내용인지 파악할 수가 없다.
코민테른은 20세기 초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 블라디미르 레닌이 주도해 만든 국제 공산주의 조직으로 제3인터내셔널로 불리기도 한다. 당시만 해도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빈부격차 확대 등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이 극심하게 나타나던 때라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적극 지원한다는 코민테른의 선전은 식민지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호소력이 컸다.
코민테른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해체됐으나 관련 문서들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 문서관으로 옮겨져 오랫동안 햇볕을 보지 못했다. 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 코민테른에 관한 연구가 시작돼 나라별로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자료가 간행되고 있다. 자료집을 내려면 문서를 관리하는 ‘러시아국립 사회정치사문서관’과 정식 계약을 맺고 편찬작업을 공동진행해야 한다. 일본 관련 문서들을 수록한 791쪽의 <코민테른과 일본>은 2001년 간행됐다. 와다 교수가 이끄는 일본역사가기금과 문서관이 맺은 협정에 따라 나온 것이다.
<코민테른과 조선>은 일본편보다 6년 늦게 마무리됐다. 자료 수집과 선택, 해제 작성에 러시아와 일본 학자, 그리고 일본 와코대학의 유호종 교수가 관여했다. 1918년부터 41년 사이의 사료 256점이 수록돼 있는데, 대부분이 처음 공개되는 것이라고 한다. 코민테른의 방침, 결정 과정을 보여주는 각종 회의의 기록과 테제 등이 거의 수록돼 있고, 조선인 활동가가 제출한 활동보고, 의견서, 편지 등이 포함돼 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41년 하바롭스크 근방에서 ‘친치천’이란 중국 이름으로 쓴 중국공산당 활동보고서와 그것에 대한 코민테른의 만주 빨치산 운동에 대한 총괄 평가서도 나온다. 와다 교수는 문서로만 보면 코민테른 활동가들 사이에 김일성이 조선인이라는 인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료집에는 이동휘·조동호·김단야 등의 사진이 수록돼 있는데, 초기 한인사회당 결성에 주도적 구실을 한 박진순의 사진이 처음 나온 것도 의미 있다는 것이 와다 교수의 지적이다.
이 자료집에는 20세기 전반부의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사료들이 들어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남과 북 어디에서도 큰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좌파 진영의 독립운동을 김일성 계열의 활동으로 일원화한 북한에서 처형된 박헌영의 30년대 활동자료를 들여다볼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자료집 간행에 돈을 댄 쪽은 한철문화재단(이전의 한국문화연구진흥재단)이다. 파친코 사업으로 큰돈을 번 한창우씨가 한국 문화와 한-일 관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지원한다며 90년 일본에서 세운 재단이다. 초기 사회주의 운동과 코민테른의 관계에 정통한 임경석 교수(성균관대)는 “요즘 분위기에서 이런 자료의 입수 간행에 관심을 보일 정부기관이나 재단이 어디 있겠느냐”며 “대부분의 현대사 연구자들이 자료집 출간 사실조차 잘 모르고 있는 만큼 빨리 번역이라도 돼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적통을 이었다는 남쪽에서 박은식 선생의 <독립운동지혈사>가 국역된 것은 일본보다 한참 뒤였다. 우리 역사를 일본을 통해, 일본보다 늦게 알게 되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다.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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