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6.17 19:50
수정 : 2008.12.23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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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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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순칼럼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 국면으로 치닫던 1945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유엔) 헌장을 마련할 목적으로 회의가 열렸다. 많은 나라들이 회의를 맡고 나선 주최국의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미국이 샌프란시스코에 50개국의 대표를 모은 것은 초강대국의 위신과 관대함을 과시하려는 데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숨겨진 이유는 회의장을 미국 본토에 마련해야 각국 대표들의 협상전략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각국 대표단이 미국 통신회사를 이용해 본국 정부에 전문을 보낼 때 나오는 천공 종이테이프가 통째로 미국 정보기관에 전달됐다.
미국이 유엔본부의 설립 장소로 뉴욕을 강력히 밀고 나온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본부 주변과 각국 대표단의 숙박시설 등을 도청·감청하는 데 단연 유리한 고지가 저절로 확보되기 때문이다. 소련도 미국의 속셈을 파악하고는 있었지만, 미국땅에 수십 명의 스파이를 합법적으로 보낼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했다. 통신기술의 발달로 종이테이프가 자기테이프로 바뀌자 미국의 통신회사들은 자기테이프 원본을 정보기관에 그냥 넘겨주는 것을 주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감청 전문기관인 국가안보국은 뉴욕의 중앙정보국 소유 사무실 등을 이용해 테이프를 복사한 뒤 원본을 돌려줬다. 이런 파렴치한 행위는 70년대 중반 미국 상원에서 정보기관의 권한남용과 비리가 도마에 오르기까지 은밀하게 지속됐다. 그렇지만 상원의원들이 문제 삼은 배경은 외국 공관이나 외교관들에 대한 공공연한 스파이 활동이 아니라, 자국민의 통신비밀 유지 권리가 침해당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런 판국이니 전신 팩스는 말할 것도 없고 새롭게 등장하는 다양한 형식의 메시지 교환을 탐지·파악·해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나라가 엄청난 비용을 들여 갈고 닦은 재능을 썩힐 리가 없다. 냉전의 종식으로 가상적국의 군사정보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자 통상정보 파악에 도·감청 능력이 본격적으로 투입되기 시작했다. 95년 여름 일제 고급차의 수입문제로 통상마찰이 불거지자 미국과 일본은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협상을 각기 자국에서 열자고 주장한다. 결국 타협이 이뤄져 스위스의 제네바와 미국의 워싱턴에서 협상을 나눠 하기로 했다. 미국 대표단의 처지에서 보면 일본 대표단이 ‘아주 고맙게도’ 비화기보다는 도청이 쉬운 호텔 전화를 주로 사용했다고 한다.
입만 열면 자유민주주의의 보루를 자처하는 미국이 전혀 신사답지 않은 행위마저 서슴지 않는 것은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추구하는 데 모든 것을 걸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전쟁에서 윤리와 도덕성이 크게 문제되지 않듯이 ‘경제전쟁’으로 불리는 통상분쟁에서 당사국들은 상대방의 수를 읽고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통상교섭 협상에서 ‘응석부리기’는 통하지 않는다. 두 달이나 우리 사회를 들끓게 하고 있는 쇠고기 협상 파문을 보면 한국 대표단이 무슨 준비를 하고 임했는지 어처구니가 없다.
이제 우리 정부 실무진도 미국의 수법을 대충 파악하고 있어 보안대책에 상당한 신경을 쓴다고 한다. 하지만 상대방의 약점을 철저히 분석해 양보를 끌어내는 데 필수적인 기초사항부터 챙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쇠고기 수입개방 압력의 본산인 미국 축산업계의 내부전략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다. 협상을 졸속으로 처리한 것도 한심하지만, 옹색한 뒤처리도 보기 안쓰럽다. 나라꼴이 이래저래 말이 아니다.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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