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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8.19 20:57 수정 : 2008.12.23 17:10

김효순 대기자

김효순칼럼

일제에서 해방된 지 63년이 지났어도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일제 강점 아래서 헤집힌 상처가 여태껏 아물지 않은 탓이리라. 피해자들의 요구 수준에 걸맞게 전후 보상이 이뤄진 경우는 없다. 다양한 피해 사례 가운데 시기적으로 비교적 늦게 알려진 것이 군대위안부 문제다. 성폭력을 동반한 노예노동이라는 문제의 속성상 피해자들이 먼저 나서 진상규명과 배상을 요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옛 위안부 할머니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만행을 고발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에 들어서다.

조선인 시베리아 억류 문제는 피해자들의 아픔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현대사의 비극과 모순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럼에도, 소수의 연구자나 활동가를 제외하고는 피해자들의 기막힌 인생 역정을 아는 사람들이 드물다. 그런 배경에는 외부적 요인도 한몫을 했다. 옛소련에서 전쟁포로 억류는 스탈린의 극비 지시에 따른 것이어서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때 관련 극비문서들이 공개되기까지는 금기사항이었다. 러시아 지도부가 심각한 인권유린을 인정하고 일본에 사죄 의사를 표명한 것은 93년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처음이다. 일본 지도층들은 60만이 넘는 ‘천황의 군대’가 포로가 돼 장기간 억류된 것을 국가의 수치로 간주해 가급적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피했다. 자국 피해자들의 보상 요구를 자칫 잘못 다루면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피해자들의 보상 요구를 교묘하게 회피해 온 전후 일본 정부의 정책 기조가 뿌리부터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했다.

그렇다면, 침략전쟁의 당사국이 아니고 가해자도 아닌 우리 사회에서 공개적 논의가 거의 이뤄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자명하다. 48년의 정부 수립 이후 우리 사회가 여러 부분에서 이룬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일제 잔재 청산과 분단 상황의 극복이라는 근본 과제를 주체적으로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1990년의 한-소 수교 이후 청와대나 외무부 등에 진정서를 보내 보상해결을 촉구했지만 반응은 차가웠다. 피해자들의 모임인 삭풍회 이병주 회장은 우리 정부에 기대할 것이 없다고 격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억류 피해자의 한 사람은 필자가 한번 만나서 지난 세월의 얘기를 듣고 싶다고 전화를 했더니 “내 인생 다 망가졌는데 이제 얘기를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반문했다. 그는 우리 정부는 물론이고 미국·일본·러시아 정부 어디를 믿을 수 있느냐며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실제로 시베리아 억류자의 보상 문제가 한-일, 한-러 외교 당국 간 회담에서 진지하게 거론된 적이 없다. 일본에서 전후 보상 운동에 폭넓게 관여하고 있는 아리미쓰 겐 전후보상네트워크 대표는 한국 정부의 소극적 자세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기회 있을 때마다 러시아와 일본 정부에 억류 피해자들의 보상 문제가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다고 상기시켜야 일본인 활동가들도 일본 정부에 성의 있는 대응을 촉구할 수 있는데 안타깝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 차원에서 억류 문제에 대한 조사가 진행된 것은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가 유일하다. 삭풍회 대표가 2005년 2월 피해사례 접수를 한 데 따른 것이다.

실상이 이런데도 요즘 친일청산은 과거회귀적 발상이며 8·15를 건국절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들 사이에 거세지고 있다. 피해자들은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피해자들이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사라져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일본의 우익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김효순 대기자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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