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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9.30 20:24 수정 : 2008.12.23 17:08

김효순 대기자

김효순칼럼

중국 현대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한 영국인의 짧은 삶을 그린 영화 <황시>가 국내에서 상영 중이다. 이 영화는 중일 전쟁이 본격화되던 1938년 1월 스물셋 젊은 나이에 잠시 상하이에 들렀다가 전쟁고아들을 보살피느라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45년 7월 중국 오지에 뼈를 묻은 조지 호그의 실화를 바탕으로 윤색한 것이다.

새내기 프리랜서로도 활약했던 호그가 중국 현대사의 질곡에서 요절한 반면,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 와 거의 반세기 동안 동아시아의 역사를 지켜본 프랑스 언론인이 있다. <아에프페>(AFP) 통신의 전신인 <아바스> 통신의 4년차 기자였던 로베르 길랭이 중일 전쟁을 취재하라는 지시를 받고 시베리아 횡단철도 등을 이용해 20일 걸려 상하이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937년 가을이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아시아 인연은 47년 신생 일간지 <르몽드>로 소속을 옮긴 뒤에도 계속됐다. 10년 전에 타계한 그의 회고록 <격동의 극동-아시아에서의 한 인생>에는 폭넓은 취재 역정이 꼼꼼히 기록돼 있다. 태평양 전쟁, 조르게 사건, 맥아더 사령부의 일본 통치, 인도·파키스탄의 분리 독립, 한국 전쟁, 디엔비엔푸와 인도차이나 전쟁, 신중국의 변천과 문화 대혁명 등을 서술한 부분을 읽다 보면 당시의 현장에 동행한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의 수많은 취재 일화에서 두 가지만 소개하고 싶다. 하나는 일본 패전 후에도 감옥에 계속 구금됐던 공산주의자들을 찾아내 석방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형무소에서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평화주의자 등 모든 경향의 ‘위험 사상가’들이 풀려났는데, 일제와 천황제에 끝까지 저항했던 공산당원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여겨 이들의 소재 탐문에 나섰다. 수소문 끝에 공산당 지도부가 도쿄 인근의 후추형무소에 수감돼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동료 기자와 함께 미군 장교를 사칭하며 소장 면회를 요청했다. 소장과 간수들이 정치범의 존재를 부인하자, 길랭은 간수를 앞세워 결국 이들을 찾아냈다. 보도의 여진은 거세게 일어 수감자 석방과 함께 특별고등경찰(특고) 해체, 내무상 파면, 당시 내각의 총사직으로 이어졌다.

또 하나는 신중국에 대한 장문의 르포 기사를 56년 초 르몽드에 18회 연재한 것이다. 그 전년인 55년 4월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제3세계 수뇌들이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역사적 회동을 한 자리에서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 총리가 문호개방을 선언하자, 길랭은 재빨리 입국비자를 신청했다. 그는 그해 가을 당시로서는 중국 대륙과 자본주의 세계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인 홍콩 인근의 로후차오를 혼자서 지나 각지를 취재하는 ‘편의’를 제공받는다. 하지만 그의 르포 기사는 중국의 전체주의적 양상을 신랄하게 비판해 철학자 사르트르 부부로부터 신중국에 대한 무례한 중상이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념적으로 쏠리지 않은 그는 한국 전쟁을 어떻게 보았을까? ‘주의 깊게 격리된 전쟁’, ‘실제 전쟁의 감촉을 재어 보기 위한 견본 전쟁’, ‘피뢰침 전쟁’, ‘백신 전쟁’ 등 다양한 표현이 등장한다. 동서 양진영에 끼인 채 잔인한 살육전이 수년째 지속되도록 방치된 일면을 지적한 것이다.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시작된 시대착오적 역사교과서 공격에 교과부·통일부·국방부 등 중앙 정부 부처가 가세하더니 이명박 대통령까지 거들고 나섰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이해하려면 복합적 시각이 필수적이다. 50년대 자유당 정권 시절에나 통용됐음 직한 역사관을 강요해 온 국민을 ‘역사 백치’로 만들려고 작정한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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