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0.21 20:44
수정 : 2008.12.23 17:07
|
김효순 대기자
|
김효순칼럼
기민(棄民)이라는 낯선 말을 의식하게 된 것은 15년 전의 일이다. 일본 간사이 지방에 거주하는 재일동포들을 집중적으로 만나면서 국내에서는 듣지 못했던 이 말을 자주 들었다. 맥락으로 보아 나라로부터 버림을 받은 상태나 버림받은 백성을 가리키는 의미로 이해를 했다.
식민통치의 직접피해 당사자인 1세들이 급속히 사라지고 2, 3세의 비중의 높아지고 있는 재일동포 사회의 변화를 취재하던 때였다. 척박한 생존조건에 놓인 이들이 교육·결혼·취업 등 삶의 현장에서 겪는 갈등과 정체성 혼란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얘기가 본국 정부와의 관계에 이르면 동포들의 입에서 기민정책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특히 남쪽 정부를 가리킬 때 빈번히 등장했다. 북쪽 정부는 재일동포를 ‘공화국 공민’으로 간주해 나름대로 민족교육을 지원하는 정책을 쓰기도 했지만, 남쪽 정부는 그야말로 깡그리 무시하고 팽개쳤다는 것이다. 1960년대 중반 한-일 협정 협상이 난항하던 무렵, 5·16 쿠데타 세력의 핵심이 “조금 지나면 다 일본에 귀화할 사람들”이라고 말한 것이 동포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올여름 이번에는 일본 사람들로부터 같은 말을 제법 들었다. 이들은 이른바 시베리아 억류자 문제를 얘기할 때 역대 일본 정부의 자세를 기민정책이라고 지적했다. 억류자 문제는 2차대전 종전 후 중국의 동북 3성, 사할린, 쿠릴열도에 주둔했던 일본군 60여만명이 소련군에 연행돼 시베리아 등지에서 2년에서 10년간 강제노동에 처해진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일제의 징병정책으로 일본군에 억지로 끌려갔던 조선인 수천명도 처절한 고생을 감내했다. 일본인 포로들은 재입대한 30~40대의 나이 든 사병들이 많아 억류기간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약 6만명에 달했지만, 일본 정부는 억류 경험자들에 대해 공식 사죄와 보상 요구를 거부하는 자세로 일관했다.
그제 일본에서 부음이 날아왔다. 보상운동을 주도해온 데라우치 요시오 전국억류자보상협의회(전억협) 회장이 20일 정기검사를 하려고 우쓰노미야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갑자기 숨졌다고 한다. 억류 경험자 가운데 비교적 짧은 2년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데라우치 회장은 도치기현 현의원을 네 차례 지냈고, 1979년 전억협 출범 때 참여해 84살을 일기로 세상을 뜰 때까지 줄곧 활동을 했다.
7월 중순 데라우치 회장의 ‘정치적 제자’를 자처하는 다니 히로유키 민주당 참의원 의원실에서 만났을 때 그는 거동이 불편했지만, 투쟁 의지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30년 전 뇌경색을 일으켜 반신마비가 됐던 그는 재활훈련을 통해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자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보상입법 제정을 역설했다. 자민당 정권과 우익세력들이 전억협을 ‘나라를 상대로 다투는 괘씸한 단체’라고 매도하며 와해공작을 벌이고 있지만, 그는 일본 정부의 경건한 사죄를 받아내겠다고 했다. 살아생전에 정의가 실현되리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는 “체력의 쇠퇴를 기력으로 버티는 것이 하루하루의 생활”이라고 말하고 “내년이 조직을 만든 지 30돌이 되니 최후의 힘을 쥐어짜 문제를 매듭짓겠다”고 비장한 각오로 답했다.
기민은 역사의 주름 곳곳에 있다. 우리 현대사만 보더라도 조선인 시베리아 억류자뿐만 아니라 대량학살, 고문치사, 의문사, 무자비한 강권 발동과 탄압의 희생자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들을 역사의 기억에서 도려낸다고 민족이나 국가의 자긍심이 올라가지 않는다. 내팽개쳐진 백성들을 기억하고 어루만지는 것이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공동체를 성숙하게 만드는 길이다.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