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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4.25 21:44 수정 : 2008.04.25 21:44

박경철/안동신세계연합병원장

삶의창

지난 2월 어느날 강연차 광주행 비행기를 기다리다 시간이 남아 공항 3층의 커피숍에서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커피를 받아들고 자리에 앉는데 아름다운 하모니카 선율이 귀를 붙들었다.

손에 든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채 정신없이 연주에 빠져 들었다. 아름다운 연주였지만 차가웠다. 바깥 기온이 코트 깃을 세울 정도로 모처럼 매웠던 탓이었을까. 처음 들어보는 연주가 내 가슴에 한기를 몰고 들어왔다. 마치 스케이트를 신은 아름다운 소녀가 거대한 빙원을 가로지르는 느낌이었다.

종업원에게 연주곡의 이름을 물었더니 그가 시디 케이스를 꺼내 보여주었다. 한참 후에야 그 음반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들었을 때의 느낌은 달랐다. 깡깡 얼어버린 호수 위에 커다란 눈꽃이 펑펑 쏟아지는 느낌. 따뜻했다.

연주자의 이름을 포털에서 검색해 보았다. 나처럼 얄팍한 취향을 가진 이들에게까지 알려질 만큼 대중적이지 않았을 뿐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이미 꽤 알려진 하모니카 연주자였다. 그리고 알게된 사실 그는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고보니 음반 재킷에 실린 그의 눈주위가 꽤 깊어 보였었다.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리고 지난 주말 그를 만날 기회가 생겼다. 신촌의 어느 식당에서 만난 그는 재킷의 사진과 많이 달랐다. 차가운 재킷의 사진과는 달리 그는 안온하고 평안한 사람이었다. 그와 꽤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의 매니저가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에 방송국에서 취재요청을 하는 것을 거절했지요.”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그렇게 하면 훨씬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고 연주회도 성황을 이루지 않겠습니까? 왜 거절 하셨어요?” 하고 그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그가 말했다. “해마다 장애인의 날이 가까워지면 방송사들이 그러지요. 눈이 안보이는데 연주를 하는 사람, 손이 없는데 발로 그리는 사람, 손가락이 없는데 피아노를 치는 사람 … 인간승리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호기심이죠. 저는 아티스트에요. 눈과 음악은 아무런 상관이 없죠. 그래서 저는 맹인 연주자가 아닌, 연주자로 불리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에는 지난 세월 편견과 맞서온 슬픔이 배어있었다. 그 삶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의 표정을 바라만 봐도 가슴이 저려왔다. 그 순간 오래 전부터 안보이는 눈을 대신했던 그의 부인이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다. 부인은 조금 전까지 남편이 숟가락을 들기 전에 매번 작은 김치 조각과, 반찬들을 얹어 주었고, 말하기 전에 그의 앞에 물컵을 가져다 놓았으며, 식사를 마친 그의 앞에 물수건을 가지런히 놓아주었다.

부인의 손을 느낀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사람 내일 출산해요. 내일부터 아버지가 되는 거죠. 아이가 제 음악을 들으면 배를 발로 쿵쿵 찬데요. 벌써 소질이 보이죠?” 그 말에 부인의 고운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보니 부인의 배가 만삭이었다. 그들은 세상을 볼 수 있는 나보다 백 배쯤은 행복해 보였다. 아내가 내민 손을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그를 바라보며 맹인 연주자 전제덕이 아닌, 아름다운 연주자 전제덕으로 불리는 날이 곧 올 것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가 그 자리에서 사인펜을 들고 정성들여 사인해준 그의 음반을 소중하게 받아들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다시 그의 음악에 빠져 있다. 그리고 아름다운 연주자 전제덕,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부인과, 지금쯤은 세상에 태어났을 그의 아이에게 세상 모든 신들의 축복이 봄비처럼 흠뻑 쏟아져 내리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박경철/안동신세계연합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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