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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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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창
“당신, 용한 게 두 가지예요.” 어떤 날 아내의 말. “한 가지는 잠자는 거, 또 한 가지는 원고 쓰는 거요. 그때만은 어찌 그리 오래 한자리에 머물러 있나 해서.” 아내의 지적인즉 내 성격으로는 잠도 돌아다니면서 자고 원고도 움직이면서 써야 할 것 같다는 것이다. 역동적인 내 성격을 꼬집어 하는 말이다.나는 ‘일’하는 걸 좋아한다. 가만히 있을 때는 잠자고 원고 쓰고 책 읽을 때뿐이다. 남는 시간엔 마당을 파 뒤집어 채소도 심고, 풀도 매고, 자투리 목재로 의자도 짜고, 나무로 그릇도 만들고, 액자도 옮겨 걸고, 장롱 문짝도 고치고, 선반도 새로 해 달고, 책장도 바꿔놓고, 하다못해 창고 청소라도 사서 해야 한다. 그래서 허리와 어깨엔 늘 파스가 붙어 있다. 이를테면 나는 왜소한 체구와 안 어울리게 ‘노동’ 중독이라 할 법하다.
외국에 오래 있다가 돌아와 함께 살게 된 막둥이가 제 어미한테 했다는 말. “엄마, 이층 제 옆방에요, 박씨가 한 분 살아요. 잡부요.” 막둥이는 때로 끙끙거리는 신음 소리까지 내가며 일을 만들어 하는 내가 신기했던 모양이다. 이후 가족들 사이에서 내 별명은 ‘이층 박씨’가 됐다. 가족들의 휴대전화에도 내 전화번호가 요즘은 모두 ‘이층 박씨’로 표기돼 있다. 개인주택에 살면 늘 할 일이 생긴다. 우리 집에선 그나마 ‘이층 박씨’가 있어서 집안 꼴이 제법 반듯하게 유지된다는 것에 나는 늘 자긍심을 느끼는데, 가족들은 내 역동성을 두고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다’는 쪽에 오히려 방점을 찍는다.
그래도 물론 섭섭하게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일을 좋아하게 된 내력이 애당초 가족들을 위해 버릇 들인 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일할 때가 행복하다. 어렸을 때 농촌에서 자라면서 언제나 일하는 사람들 속에서 컸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할 때 내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해진다. 돌아보니 이것은 생애를 관통하는 내 삶의 참된 에너지이고, 윤리성이고, 동시에 자부심의 근원이다.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20세기 사람으로 꼽는다는 스콧 니어링은 백 살이 되었을 때, 이제 일할 수 없으니 먹을 권리도 없다면서 스스로 단식을 통해 죽음에 이르렀는데, 그렇게 극단적일 수는 없겠지만, 나 또한 일할 힘이 전혀 없게 되면 삶에서 아마 아무런 충만감도 느끼지 못하게 될 것 같다.
요즘 자라나는 아이들은 ‘노동’을 배우고 경험할 기회가 거의 없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오직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만이 유일무이한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제 방 청소조차 시키지 않는 부모가 많다. “청소는 무슨, 넌 그저 공부만 해.” 학교도 마찬가지, 반별로 화단이나 텃밭을 가꾸게 한다든가 운동장 풀매기를 한다든가 일로써 이웃돕기를 한다든가 하는 프로그램을 시행했다간 당장 학부모들의 항의를 받을 것이다. 학생들이 삽으로 일일이 파내어 연못을 만들었던 내 모교의 일화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공부’하는 일이 나쁜 것은 물론 아니지만 ‘노동’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어른들이 오히려 빼앗는 교육환경이란 ‘사람다운 사람’을 기르자는 것이 아니다. ‘공부’만 해서 그가 어떻게 인생의 큰 위기를 헤쳐갈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린이나 젊은이에게 가르쳐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은 ‘노동의 즐거움’과 ‘사랑의 환희’일 것이다. 구태여 노동보다 더 재미있는 게 인생에 있다면 나는 ‘사랑’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노동의 경험은 참된 휴식과 아울러 인간다운 사랑에 대한 학습효과를 저절로 불러온다. 우리 교육의 근본적인 걸림돌은 꼭 가르치고 경험하게 해야 할 이 두 가지 덕목을 위한 프로그램이 너무 없다는 것이다. “노동 없는 기쁨은 비천하다.” 영국의 사상가 존 러스킨의 말이다.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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