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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9.04 20:08 수정 : 2009.09.04 21:57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지난봄 내가 펴낸 소설 <고산자>엔 술 취한 김병연, 일명 김삿갓이 왜 ‘대동여지도’에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그려넣지 않았느냐고, 김정호 선생을 힐난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어 동석해 있던 당시 삼도수군절제사 신헌도 덧붙여, 우산도 ‘독도’를 어째서 대동여지도에 그려넣지 않았느냐, 김정호를 공박한다. 김정호가 독도를 그의 지도에서 뺀 것은 정확한 축척지도를 지향한 대동여지도의 경우, 목판본으로 제작하는 과정에서의 여러 불편함을 고려해 울릉도에서 무려 200여리나 떨어져 있는 독도를 뺐을 거라는 설이 유력하다.

9월4일은 간도협약 100년을 맞는 날로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이 문제에 대한 학술대회 소식과 함께 누리꾼들의 설왕설래도 더러 올라와 있다. 침묵하고 지나가는 것보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소식이다. 간도협약은 일본이 1909년 만주에서의 철도부설과 탄광채굴권을 얻기 위해 그 대가로 청나라에 간도 영유권을 내준 조약으로서 국제법상 무효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노무현 대통령 때 외교통상부 장관이었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국회 답변에서 ‘간도협약은 법적으로 무효’라고 밝힌 바 있다.

간도는 두만강·압록강 북쪽 지역으로, 중국은 물론 러시아와도 국경이 맞닿은 광대한 땅이다. 일찍이 고구려의 강토였고, 발해가 여기에서 번성했던 것은 알려진 사실 그대로다. 청나라가 세워지기 전까지만 해도 간도에서의 국경문제는 별로 심각하게 대두되지 않았던 듯하다. 예전에야 국경을 자로 잰 것처럼 분명하고 꼼꼼하게 인식하지 않았을뿐더러, 워낙 춥고 험한 곳이라서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의 국경문제가 예민해진 것은 청나라가 제 민족의 발상지를 이곳이라 하여 간도는 물론 백두산 일대를 성역화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1712년에 세운 백두산 정계비에 비로소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라 하여 압록강 토문강을 국경으로 삼는다 명시했으나, 토문강이 과연 어떤 강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중국은 토문강을 두만강이라 하지만, 토문강은 송화강 상류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역사적 근거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토문강이 송화강 상류라면 연해주 일대는 당연히 우리의 국토이다.

독도나 간도만 국경문제가 걸려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인 근거를 따라가다 보면 압록강·두만강 하류의 몇몇 섬도 문제 안에 포함되어 있고, 대마도나 오키나와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조선 시절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국경문제에선 우리의 조정이나 정부가 일관되게 매우 수세적이었다는 데 있다고 본다. 간도협약에 대한 학술대회에서 많은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한 핵심도 ‘우리 정부에 간도 정책은 전혀 없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중국이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동북공정’과 비교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을 단순히 비겁하다 할 것인가, 아니면 강대국 곁에서 살아남기 위한 지혜라 할 것인가. 이는 국경문제에 한정되는 게 아니다. 가령 한-미 관계도 그렇다. 대등하지 못한 한-미 간의 제반 협약 같은 것도 ‘비굴’인가 ‘지혜’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소설 <고산자>에서 비변사 관리에게 끌려가 치도곤을 맞는 고산자 김정호 선생은 이렇게 조정의 고위 관리에게 피맺혀 묻는다. “그럼, 저 광대한 간도가 다 청입니까… 소인은 지금 사사로운 형문으로 죽을 지경에 빠진 미천한 지도장이일 뿐입니다… 다만 지도를 그리며 답답한 일이 왕왕 있었나이다. 병조나 비변사 관리들조차… 사사로이 만날 땐 간도나 대마도를 본래 우리 땅이라 하옵고, 공식적으로 확인해 주십사 하면 한결같이 어물쩍 꽁지를 빼니, 백성들은 어찌하고, 황차 소인 같은 지도꾼들은 어찌 제 나라를 바르게 그리겠습니까?”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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