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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순재 감리교신학대 교수·교육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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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요즈음 대입 정시모집 ‘내신’ 실질반영 비율 문제를 둘러싸고 떠들썩하다. 하지만 내게는 이런 논쟁이 소모적으로 보인다. 현 사태는 우리 사회가 대학입시 구조의 모순을 명쾌하게 풀어내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신제에 관한 교육시민단체들의 이번 주장이 실상은 대학입시 때문에 사회적으로 고통받은 아이들을 변호하기 위한 부득이한 ‘차선책’이었음을 알고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차제에 당사자들이 ‘반영 비율’을 그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식으로가 아니라, 문제를 근본적으로 좀더 철저히 파고들었으면 한다.이 대목에서 나는 그간 교육부는 물론 여러 대학의 책임 있는 당국자들이 보여 온 태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이 대학들은 어떻게 하면 우수한 학생들을 뽑을까 하는 데 급급해 있는 반면, 그간 우리 사회를 광기로 몰아넣어 왔던 입시경쟁 문제에 대해서는 무사태평식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 교실은 황폐화되어 버렸고, 학생들은 야밤에 학원가를 헤매며, 해마다 입시로 목숨을 끊는 청소년들이 부지기수라 할지라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걸 보면 한국의 많은 대학들이 ‘교육’이라는 것을 ‘어떤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여기서 대학입시는 ‘추려내기 위한 틀’에 다름 아니며, 대학교육이란 ‘엘리트 계층’을 양성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현 사태는 우리가 아직도 조선시대 신분사회적 세계관 속에 갇혀 살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행복한가?
문제는 제대로 판단해야 한다. 오늘날 서구 사회와 대학이 경쟁력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잘 보면 이것은 그들이 이미 갖추어 놓은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분사회에서 기회를 공유하기 위한 시민사회로의 변혁이었으며, 또한 그러한 사회구조에 맞추어 교육의 틀을 재편한 것이었는가 하면, 거꾸로 교육을 통해서 그러한 사회적 변혁을 도모하기도 한 것이었다. 그 기본 골격이 갖추어진 때는 17~18세기 ‘계몽주의 시대’였고, 그 최종적 성과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들어서 고등교육 분야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기울인 숱한 정신적 추구와 정치적 투쟁 없이 오늘날의 서구 사회와 교육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서구 사회가 오늘날 대학의 학문적 수월성을 강조하는 자리에서 대학의 사회적 책무를 아울러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바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견지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요컨대 민주 시민사회의 구현, 타자와의 소통, 사회적 약자와의 공존 등을 위한 노력은 국·공·사립을 막론하고 추구해야 할 마땅한 본분이요, 사립대학들이 종종 거론하는 자율성에 선행하는 의무인 것이다.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의 대학들을 한번 보라. 이 두 날개로 얼마나 멋지게 날 수 있는지를! 그건 고소득 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모르시는 말씀이다. 이 나라들이 오늘날과 같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그러한 사회적 책무 위에 대학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신제에 대한 공박과 우리의 현 입시체제는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가 얼마나 편협하고 미성숙한 것인지를 여실히 증명해 준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최근 화려하게 치장되고 있는 한국의 유수한 대학들에서 그렇게 ‘계몽된 정신’을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의 대학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미래를 준비하려 한다면 바로 이러한 정신을 체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을 숨 막히는 ‘경쟁력’이라는 말보다는 우리의 대학을 진정으로 살게 하는 ‘아름다운 능력’이라 표현하고 싶다.
송순재 감리교신학대 교수·교육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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