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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식/제주 4·3연구소장·제주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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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4월이 왔는데도 한라산에는 아직도 하얀 잔설이 뚜렷하다. 엊그제 제주시내 관덕정 마당에서는 4·3 당시 전국 각 지역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행방불명된 사람들을 위한 합동노제가 치러졌다. 해마다 형무소 옛터를 떠돌던 혼백을 고향으로 모셔와 제사 지내는 의례였다. 이들 행불자들은 60년 전 군경 토벌대의 진압작전 때 집단학살을 피해 한라산으로 숨어든 사람들이었다. 1949년 봄이 되어서야 ‘내려오면 살려준다’고 하여 산에서 내려온 이들에게는 가혹한 군사재판과 형무소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들 대부분은 국군에게 총살됐다. 정부 위원회의 노력으로 4·3의 진상이 드러났음에도 이들 희생자의 행방은 아직도 규명되지 못했다. 영혼은 귀신이 되어 이승을 떠돌고 있다. 2003년 10월 확정된 정부의 4·3 진상보고서는 희생자 수를 2만5천∼3만명으로 추정했다. 진압 과정에서 국가 공권력이 법을 어기면서 민간인들을 살상하는 등 중대한 인권유린과 과오가 있었음을 지적했다. 특히 4·3 진상규명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1만5095명) 가운데 어린이와 노인·여성 등 노약자가 전체의 33%를 차지하고 있음을 밝혔다. 이렇듯 제주섬 곳곳에서 벌어진 숱한 죽음을 가져온 사태의 원인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갔는가? 미군정 당국과 대한민국 신생국가의 인식은 ‘폭동’과 ‘반란’이라는 지점에서 일치한다. 미군정의 통치를 거부한 폭력적 움직임이며, 대한민국 체제에 대한 반역 행위였다는 것이다. 폭도와 반도뿐만 아니라 그들에 참여·협조한 주민들 또한 제거 대상이 되었다. 반면 제주섬 주민들이 공권력의 부당한 탄압에 정당하게 저항한 사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오히려 강력한 공동체적 저항을 더욱 가혹한 진압의 구실로 삼았다. 4·3은 세계 냉전구도와 한국의 분단체제가 빚어낸 사생아였다. 미·소와 한반도의 남북이 관련을 맺었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제주섬 사람들에게만 상처를 남겨 놓았다. 제주 사람들은 밖에서 들어온 이념과 공권력에 휘둘린 채 국민·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바로 눈앞에서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세계 최강국 미국은 47년 3월1일 미군정 경찰의 발포로 생긴 민간인 희생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 한마디 없이 탄압으로 일관했다. 48년 4·3 봉기에 대해서도 김익렬 제9연대장이 주장한 선무작전을 수용했다면, 뒷날 엄청난 인명 피해는 비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신생 대한민국이 4·3을 ‘반란’으로만 여기지 않았어도 민간인 대량 학살을 가져온 초토화 작전은 강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4·3은 국가의 국민에 대한 기본 인식이 천박함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최근 뉴라이트 진영에서 발간한 대안교과서에는 “제주 4·3 사건은 남로당이 일으킨 무장반란, 북한 김일성의 국토 완정론 노선에 따라 일어난 것”으로 기술했다. 이 주장은 역사적으로 일고의 가치가 없지만, 4·3을 ‘북한을 지지한 반란’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민간인 집단학살을 정당화할 수 있다. 이는 자국의 체제를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불가피하게 척결할 수밖에 없다는 국가 우위의 논리라고 하겠다. 4·3은 단순한 인명살상이 아니라 ‘레드 헌트’란 표현처럼 제주도민을 인간이 아닌 사냥감으로 여기며 집단으로 학살한 ‘제노사이드’(학살)에 해당된다. 4·3 당시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예의와 성찰, 민족 공동체로서 동질감이 있었다면 민간인 대량학살 사태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영령 추념을 통해 삶과 죽음을 묵상하는 인간적 종교적 의미로서 4·3이 갖는 교훈도 60돌을 맞아 함께 돌아볼 때다.박찬식/제주 4·3연구소장·제주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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