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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4.17 20:51 수정 : 2008.04.17 20:51

김삼웅/<백범김구평전> 저자·전 독립기념관장

시론

삼천리 강산에 봄이 왔는데 남북관계는 한겨울이다. 지난 10년 동안 살얼음판을 헤치고 어렵사리 키워온 화해무드가 이명박 정부 두 달만에 물거품이 되지 않나 우려된다.

내일(19일)은 백범 김구 선생이 분단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행길에 오른지 60돌이다. 이승만 키우기와 김구 깎아내리기가 한창인 세태에서 끝까지 분단을 막고 통일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북행을 결단한 4·19를 기억하다가는 ‘친북좌파’로 몰리기 십상이다. 북행을 앞둔 경교장에는 19일 새벽부터 대동청년단·이북학련학생 등 140여 명이 몰려와 백범의 북행길을 가로막았다. “조선의 현정세는 최후 단계에 다달았다. 분열이냐 통일이냐 자주냐 예속이냐, 이러한 중대시기에 내가 남조선에 주저앉아서 일신의 안일을 원하여 주저할 것인가.” 백범은 소신을 피력하고 북행길에 올랐다.

1948년에 접어들면서 미·소공위의 결렬과 한반도 문제의 유엔이관으로 분단상황이 눈앞에 전개되고, 남북에서 분단정부수립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백범은 2월10일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삼천만동포에게 읍고’했다. 그리고 행동에 나섰다. 이것이 북행이었다. 백범은 남북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셋째날 평양에서 밝혔다. “조국이 없으면 국가가 없으며 국가가 없으면 어느 정당도 사상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공동투쟁 목표는 단선을 반대하는 것이어야 한다.”

평양에서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김회담’을 마친 백범은 5월5일 무사히 귀경했다. 김규식과 함께 낸 공동성명에서 “이 회담은 자주적 민주적 통일조국을 재건하기 위해 남조선 단선 단정을 반대하며 미소양군 철퇴를 요구하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북조선 당국자도 단정은 절대 수립하지 아니하겠다고 확신하였다”고 설명했다. 성명은 또 “앞으로 양군철퇴후 전국정치회의를 소집하여 통일적 임시정부를 소집하고 전국총선거를 통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정식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민족통일의 기초를 존정할 수 있게 하였”다고 밝혔다.

백범의 애국단심은 한민당과 이승만세력의 반대에 부딪쳤다. “남북협상은 남조선총선거를 방해하려는 공작”(한민당)이란 주장이었다. 미군사령관 하지는 남북정당사회단체대표 합동회의 요청서에 대한 불찬성 성명을 발표했다.

평양의 요인회담은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다. 김규식이 북행에 앞서 김일성에게 제시한 5개항의 선행조건 △진정한 민주국가 건설 △사유재산제도 승인 △통일중앙정부 수립 △외국에 군사기지 불제공 △미소양군철수 등에 대한 상당한 의견접근이 이루어졌다. 또 수풍발전소 송전계속·연백수리조합개방·조만식 월남허용·하얼빈 안중근의사 유해 서울봉환문제가 논의되어 앞의 두 가지는 동의를 받아냈지만, 나머지는 소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면서 북쪽은 자세한 회답을 피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백범의 통일정부수립 의지는 무산되었다. 1년 뒤 백범은 친일·분단세력에 암살되고 이승만 이래 독재시대에 ‘불온’의 주범으로 몰렸다. 다시 보수로 회귀하면서 백범을 폄훼하는 사람이 많아진다.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고 평화통일을 지향(헌법전문)하는 대한민국에서 임정의 주석이고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몸 바친 백범을 음해하는 것은 그들의 문자로 ‘대한민국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김삼웅/<백범김구평전> 저자·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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