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4.23 19:32
수정 : 2008.04.24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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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 방송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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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삼성이 경영 쇄신안을 내놓았다. 과거 삼성비리 사태 때 비하면 진일보한 방안이다. “설마 이 정도까지” 하며 놀란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불법행위를 저지른 총수와 핵심 가신들이 퇴진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잘만 하면 삼성이 황제 경영에서 벗어나 투명성·책임성·전문성을 갖춘 선진적 대기업으로 거듭날 가능성이 비친다. 사장단 협의회에 의한 그룹경영은 재벌해체 이후 일본이 창출한 기업집단 체제를 지향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이비 쇄신안이 아닌지 미심쩍은 부분도 상당하다. 우선 “설마 이 정도까지”였는가 하고 놀라게 만든 각종 비리의 진상을 이번 쇄신안 발표에서도 밝히지 않았다. 죄를 솔직히 고백하지 않는 이의 회개를 얼마큼 믿을 것인가. 계열사 독자경영을 한다고 하고서는 이건희 회장이 수렴청정을 할지 모른다. 변형된 전략기획실이 슬그머니 등장할 수도 있다. 사회 지도층을 오염시키는 일 따위가 사라질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쇄신안에는 이재용씨의 동반 퇴진이 빠져 있다. 삼성은 이 회장 일가 지분이 10%도 안 되므로 그들의 가족 재산이라기보다는 국민 재산이고, 이 회장 부자는 그 관리자일 뿐이다. 그런데 천문학적 비리의 법적·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는 두 사람은 이미 관리자 자격을 상실했다. 이재용씨의 그룹 지배권이 배임에 의한 장물임이 명백해진 상황에서, 시효가 지나 그걸 돌려주진 않더라도 그가 경영 일선에 나서서는 안 된다. 게다가 그는 직접 경영한 몇몇 사업에서 실패해 경영 능력도 퇴짜를 먹었다. 그런데도 그룹 지원으로 국외에서 업적을 부풀린 다음 새 가신과 더불어 황제 경영을 이어갈 모양이다.
또한 소유구조 면의 개혁은 찾아볼 수 없다. 올바른 소유구조를 갖추려면 삼성생명을 그룹에서 분리해야 한다. 그래야 금산분리 원칙이 지켜지며, 계약자 돈으로 그룹을 지배한다는 비판에서도 벗어난다. 이재용씨 불법승계가 삼성생명을 핵심 고리로 삼았다는 점도 분리의 필요성을 뒷받침한다. 이 회장과 에버랜드가 보유한 삼성생명 지분을 국민연금 등에 팔고, 그 돈으로 삼성전자 주식을 매입하면 된다. 그러면 삼성생명이 독립적 금융자본으로 거듭나고, 이 회장 일가의 삼성전자 지배력은 더 안전해진다. 두루 좋은 일이다. 그런데도 쇄신안은 삼성생명을 그룹 중추부로 삼겠다고 한다.
요컨대 솔직한 고백의 결여, 이재용씨의 퇴진 거부, 삼성생명의 그룹 중추부화라는 치명적 문제점을 쇄신안은 안고 있다. 재판에서 가볍게 처벌받고 3대 황제 경영을 수립하기 위한 쇼로 끝나지 않으려면, 이 회장이 이런 부분을 해결해야 한다. 아울러 계열사 자율 경영이 순항하도록 보장해야 한다. 타성에 젖은 계열사 경영진은 계속 이 회장 눈치를 볼 공산이 크다. 자칫하면 박정희 독재를 그리워하듯이 황제 경영으로 복귀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여기에 경영진 임면 방식을 비롯해 새로운 지배구조가 구축되지 않으면 경영은 표류하기 쉽다. 표류를 틈타 재벌체제를 유지하려는 게 이 회장의 의도가 아니길 바란다.
재계에선 이 회장 퇴진이 과감한 투자 같은 전략적 의사 결정을 어렵게 하지 않을까 우려한다. 그러나 권한과 책임이 제대로 부여되면 전문경영인도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잭 웰치처럼 얼마든지 과감한 투자가 가능하다. 나아가 계열사 경영진이 불법 비자금 조성, 사회 지도층 오염에 쏟던 에너지를 기업 혁신으로 돌리는 것만으로도 경영효율은 향상된다. 선진 경영이 삼성에 자리잡고 다른 재벌에도 확산되도록 우리 모두 힘을 모아야 할 시점이다. 한국 최고경영진들이 줄줄이 소환되고 사과하고 재판받는 광경을 이젠 그만 봐야지 않겠는가.
김기원 방송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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