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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6.23 21:38 수정 : 2008.06.23 21:38

조대엽 고려대 교수·사회학

시론

사람 모으기 참 어려운 세상이었다. 시민단체에는 1인 시위가 등장한 지 오래다. 이득이 없는 곳에 사람이 없다. 민주주의와 공동체의 가치는 눈길 가지 않는 박제가 되어, 이 치열한 경쟁과 시장의 일상 속에서 감염되어선 안 될 질병으로 간주됐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 현실이 나타났다. 가족·친구·동료와 함께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선 시민이 수십만에 이른 것이다. 위대한 시민행동을 우리는 확인했다. 신자유주의적 경쟁사회의 광풍에 때 이르게 묻혀버린 민주주의가 되살아났고, 우리는 잊혀진 공동체를 다시 발견했다. 촛불의 바다 앞에서 정치권력은 망연자실했고 위기관리능력의 한계마저 뚜렷이 드러냈다.

이 놀라운 현실을 보며 시민행동에 대한 과잉된 평가와 기대 또한 없지 않았다. 말하자면 촛불정국을 ‘국가권력’ 대 ‘시민권력’의 균형적 대치로 해석하는 것인데, 넘치는 촛불의 바다와 무력한 정권의 모습은 일견 이런 해석을 그럴듯해 보이게 했다. 실제로 촛불은 더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고도 위대한 시민의 힘을 보여줬지만 그것을 대칭적 권력으로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무엇보다도 촛불시민은 권력적이지 않다. 권력은 세력화하고 위계적으로 구조화되어야 하는데 촛불은 그렇지 않다. 나아가 일종의 ‘자기 제한성’도 내재하고 있다. 시민은, 더구나 광우병 쇠고기 문제로 모인 시민은 서로 다른 사회적 위치에 있기에 균일한 이념의 주체가 아니라 이질적 가치의 집합이다. 촛불시민들은 일관된 이념과 전략, 흐트러지지 않는 대오와 행동방식으로 운동을 추구하기에는 뚜렷한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촛불은 오히려 민심의 바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가장 거대한 국가권력부터 아주 조그만 이익단체까지 끝모를 민심의 바다에 각각의 배를 띄우고 있다. 배들이 순항할 때 바다의 존재는 그저 물길일 뿐이다. 그러나 바다의 존재감은 분노로 거칠어진 파도로 확인된다. 어떤 배라도 바다의 노여움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50일을 넘은 촛불집회는 이제 새로운 전환점에 선 듯하다. 진정으로 촛불을 꺼뜨리지 않는 길을 묻고 냉철한 자기규정을 내려야 할 시점이다. 촛불시위는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여중생들이 깔려 숨진 사건 이래 우리 사회에서 이미 불연속적으로 정례화됐다. 이제 촛불은 언제든 광장으로 다시 나오는 일종의 재생산 구조를 갖게 됐다.

특히 이번 촛불집회에서는 성찰적인 ‘이성적 군중’과 이를 가능케 하는 새로운 결사체의 존재가 주목된다. 온라인의 수많은 토론방·카페·블로그 등은 이슈·규모·활동공간의 제약이 없는 ‘제4의 결사체’가 됐다. 제3의 결사체라 할 수 있는 시민단체들이 90년대 이후 시민운동을 주도했다면, 이제 제4의 결사체가 한국 시민운동을 주도하는 새로운 운동주기를 맞고 있다. 촛불집회가 시민 직접행동의 새로운 정치참여 방식으로 가능한 것은 바로 우리 시대에 가장 강력한 제4의 결사체 때문이었다.

시민사회의 이처럼 변화된 질서야말로 이번 촛불집회의 마무리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안도’, 그 어느 쪽도 불필요한 판단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촛불은 언제나 참여민주주의의 새로운 질서로 새로운 이슈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 여와 야,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일체의 조직화된 권력들은 촛불시민 앞에서 정치권력적 감각이 아니라 사회변동에 대한 감수성을 높여야 한다. 촛불의 바다에 합류한 세력 또한 마찬가지다. 촛불은 아이의 양손에 고이 감싸 쥔 채 간절한 기원으로 타오를 때 비로소 수만 송이의 불꽃으로 피어난다. 만일 정치적 이념과 이익의 구호로 횃불처럼 치켜든다면 촛불은 쉽게 꺼지기 마련이다.

조대엽 고려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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