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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식(경남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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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북핵 상황이 진전되고 있다. 북한이 미뤄왔던 핵신고서를 제출하고 미국도 테러지원국 해제 조처에 착수했다. 양국은 북핵문제의 상징이었던 영변 냉각탑을 폭파함으로써 북핵해결의 의지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평가절하가 이뤄지고 있다. 아직 북핵 문제는 산 넘어 산이라는 신중함이긴 하지만 개중에는 지금의 사태진전이 별거 아니라는 비아냥이 숨어 있다.물론 장애물은 남아 있다. 핵무기가 신고서에 포함되지 않았고 미국이 납득할 수준의 검증방식과 결과도 장담하기 힘들다. 무엇보다 3단계 폐기 협상은 지금까지와 달리 매우 험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만만치 않다고 해서 지금의 북핵 상황을 일부러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다. 우려를 넘은 비웃음에 행여라도 대화를 통한 북핵 문제 해결이 가능하지 않다는 믿음이나 그 해결 방식을 원치 않는 마음이 깔려 있다면 매우 불행한 일이다.
현 상황은 지금까지 북핵 문제 과정에서 가장 진전된 국면이다. 2단계 불능화를 완료함으로써 이제 북한은 돌이키기 힘든 선을 넘었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로 이뤄낸 북핵 문제 해결은 고작 원자로 가동을 중단하는 ‘동결’이었다. 스위치만 내린 것이다. 2002년 북-미가 다시 대결하게 되었을 때 북한은 손쉽게 스위치를 올림으로써 플루토늄 생산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북-미 협상이 결렬되고 북-미 갈등상황이 재연한다 해도 북한은 원자로 가동을 할 수 없다. 더이상의 재처리나 플루토늄 추출이 불가능하다. 미국에 대항해서 핵물질을 증대시키는 위협적 행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사태가 악화되었을 때 북한이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카드를 스스로 버린 셈이다.
핵신고서 제출 역시 중요한 진전을 이룬 것이다. 과거의 핵을 규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네바 합의 당시 북한의 과거 핵활동에 대한 검증은 먼 훗날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이 북한에 경수로를 건설해주고 핵심부품이 인도되는 시점에서야 과거 핵에 대한 조사가 시작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북한 스스로 과거 핵활동에 대해 신고하고 이를 6자 회담이 검증하게 된다. 결국 지금의 2단계 완료국면은 북한이 불능화를 통해 미래의 핵을 원천적으로 포기함과 동시에 신고서 제출로 과거의 핵을 검증받는 상황인 것이다.
최근의 북핵 진전을 환영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지속되고 있는 남북관계 경색을 풀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임기 초반 기싸움에 매달려 있는 이명박 정부로서는 자연스럽게 관계복원을 꾀할 수 있는 적절한 계기가 등장한 셈이다. 북핵 상황과 남북관계를 연계시켜 놓은 이명박 정부 스스로의 원칙에 따르더라도 지금은 남북관계를 개선해야 하는 객관적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 정부는 최근 상황을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유명환 외교부 장관은 핵무기 관련 사항이 포함되지 않은 점을 언급하며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관련 당사국 중 가장 인색한 언급이었다. 라이스 장관과의 면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북핵포기 노력을 강조했을 뿐 남북관계의 역할은 언급하지 않았다. 경색국면을 돌파할 대북 지원 발표나 6·15 선언 존중 등은 아직 먼 일처럼 보인다. 먼저 손을 내밀기보다는 여전히 북이 고개를 숙이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신경전 때문에 남북관계를 뒤로 미루기엔 지금 진행되고 있는 한반도 정세가 너무나 급박하고 엄중하다. 관계 복원을 위한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노력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더이상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김근식(경남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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