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0.27 20:11
수정 : 2008.10.27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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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식 민변 공익소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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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시청률이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잘 만들어진 정치사극으로 평가받고 있는 <대왕세종>이라는 주말극이 있다. 최근 훈민정음 창제와 천문기술을 둘러싸고 명나라와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해 있는데, 그 갈등의 중심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이 바로 양국의 비밀정보기관이다. 명나라 황제 직속 정보기관인 ‘동창’은 친명파의 도움을 받아 끊임없이 세종과 장영실을 괴롭히고, 조선은 내시위 산하에 비밀첩보조직 무위군을 만들어 대항한다. 무위군의 실재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어쨌든 이 드라마는 비밀정보기관의 진정한 소임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다. ‘정보를 다루는 자’들은 결코 몸과 마음을 가벼이 하지 아니하고, 나라와 백성, 국익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국정원에 대해서는 진작부터 걱정이 많았다. 김영삼 정부 시절 안기부법이 개정되었지만 불충분한 것이었고, 김대중 정부가 국정원으로 이름을 바꾼 후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도 국정원의 완전한 개혁은 완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정원은 여전히 수사권을 가지고 있으며, 정치 개입의 가능성을 버리지 않고 있다. 국정원에 대한 국회의 통제도 지지부진하다.
국정원을 ‘경쟁력 있는 정보기관’으로 만드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종 시대에 그랬듯이 국익을 위해 활동할 수 있는 비밀정보기관은 반드시 필요하다. 더욱이 글로벌 시대를 맞아 세계는 경제·환경·에너지 등 모든 분야에서 치열한 정보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비밀정보기관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왜 우리의 국정원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국민들의 걱정거리로 남아 있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바로 비밀정보기관과 비밀경찰조직을 구별하지 못하는 정치권력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대선 전 국정원의 국외 및 경제정보 역량 강화를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역사의 수레바퀴는 반대 방향으로만 돌고 있다. 아마도 이 정부는 국정원을 촛불정국 대응 과정에서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갖고 있는 듯하다. 참여정부 기간에도 테러방지법 제정 시도 등을 통해 독자생존을 모색해 왔던 국정원은 대통령의 뜻을 ‘기민하게’ 간파하였다. 법원의 비비케이(BBK) 재판에 거리낌없이 직원을 파견하고, 사기업의 외환보유 현황과 시민단체 지원내역을 조사하는가 하면, 국정감사 결과까지 실시간으로 보고받고 있다. 국정원의 고위 간부가 언론대책회의, 종교관련 대책회의를 가리지 않고 참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더 큰 문제는 일련의 상황에 대한 정부 여당의 인식이다. 국정원 간부와의 회동에 대해 그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연히 만난 것”이라고 변명하다가, 사실이 드러나자 “국정원의 국가기관 대책회의 참석을 금지하는 법은 없다” “현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고 하면서 “국정원법에 위반되지 않음”을 강변한다. 그들은 심지어 “불법이라야 고급 정보가 나온다”며 국정원의 불법행위를 부추기기도 한다. 비밀정보기관이 ‘정권의 이익을 위해 불법을 거듭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결과는 비밀경찰로 전락하는 길뿐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국정원은 스스로 앞길을 좌우할 힘이 없다. 비밀정보기관은 속성상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향방이 결정된다. 국정원의 자리매김은 온전히 대통령의 몫이라는 뜻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제라도 정권을 위한 ‘비밀경찰’의 유혹에서 벗어나, 국정원을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경쟁력 있는 비밀정보기관’으로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비밀정보기관의 참모습이다.
장유식 민변 공익소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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