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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3.20 18:51 수정 : 2009.03.20 18:53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시론

3월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99주년이다. 안 의사는 이날 찬비 내리는 뤼순감옥 형장에서 32살의 짧은 삶을 접었다. 그보다 15년 전 전봉준 장군이 처형될 때에도 종일 궂은비가 내렸다. 중국 서한 시대의 철학자 동중서는 사람과 하늘이 서로 감응한다는 ‘천인감응설’을 폈다. 일제가 조선의 두 영웅을 죽인 날에 하늘인들 어찌 무심했을까.

이날 안 의사는 어머니가 섬섬옥수로 지어 보낸 한복을 입고 꿋꿋한 기상으로 처형대에 올랐다. 추호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을 자랑스러워하면서, 밧줄을 목에 걸었다. 아마 빗속에서 아스라이 식민지로 전락해 가는 조국의 참담한 모습을 그리면서 숨졌을 것이다. 하늘은 가끔 인성뿐 아니라 신성도 갖춘 사람을 세상에 낸다고 한다. 안 의사의 고결한 삶과 순결한 인성은 눈물겹게 우리의 가슴을 저미고 고매한 인격과 죽음에 이른 신성에는 오롯이 숙연해진다.

일제는 전봉준에게 협력하면 일본으로 망명시켜 후일을 도모하게 해주겠다고 유혹했고, 안 의사에게는 이토 히로부미 처단이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한마디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했다. 두 장부는 일언으로 이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다. 사마천은 말한다. “죽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죽음에 처하는 것이 어렵다.”(非死者難 處死者難)

우리는 흔히 안 의사를 생각할 때 이토를 처단한 ‘10·26 의거’를 떠올린다. 하지만 안 의사는 20대에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고, 유산을 털어 학교를 두 개나 세워 민족 교육장을 만들었다. 일제의 침략이 가열되자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의병참모중장으로 최전선에서 싸우고, 의열 지사들과 단지동맹을 맺어 살신구국을 하늘에 다짐했다. 그리고 이토 처단에 나섰다. 이토는 대한제국 대신들을 겁박하여 을사늑약을 맺고 외교권을 강탈한 국적 제1호였다. 의열 지사들이 그의 처단에 나섰지만 적의 수괴에게 접근이 쉽지 않았다. 이토는 조선에 이어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만주로 건너갔다. 안 의사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하얼빈역에 내린 이토에게 권총 6발을 쏘아 3발을 명중시키고 수하들을 쓰러뜨렸다.

일제와 한국 친일세력은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라 부른다. “폭력에는 자유롭게 하는 폭력과 속박하게 하는 폭력이 있다”(신학자 카잘리스)면 안 의사의 의거는 자유롭게 하는 폭력이었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고 공화주의자이고 휴머니스트였다. 옥중에서 저술한 미완의 <동양평화론>은 100년 앞을 내다본 비전이다. 한·중·일이 동양평화회의 기구를 구성하고 국제분쟁지 뤼순을 중립화하여 그곳에 평화회의 본부를 설치하고, 3국 공동의 개발은행을 설립하고 공동화폐·공동평화유지군을 창설할 것을 제안했다. 유럽공동체(EU)가 구성되기 70년 전의 일이다.

그는 세계평화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준 선각자이다. 현실은 어떤가. 안 의사의 사상과 행적에 배반되는 신문이 안 의사를 팔고,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독립운동을 폄훼하고 안 의사가 추구했던 공화제가 짓밟힌다. 중국의 대국굴기와 일본의 재무장이 동양평화를 위협하는 터에 남북은 무력 충돌로 치닫는다.

백범 김구는 1949년 3월 안 의사 순국 39주년을 맞아 ‘총욕불경’(寵不驚)이란 시를 썼다. 내용 중에 “나방이는 오로지 밤 촛불에 뛰어들고/ … 올빼미는 오직 썩은 쥐를 즐겨 먹는다/ 아, 슬프다/ 세상에 나방이와 올빼미 같지 않은 자 몇이나 되는가”란 대목이 있다. 동족상쟁의 유혈을 내다보면서 오로지 권력과 이욕 때문에 불에 뛰어드는 나방과 썩은 쥐를 찾는 올빼미 같은 자들을 질타하면서 안 의사의 거룩한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겼다. 어찌 오늘의 상황과 이리도 닮았을까.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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