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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4.14 22:10 수정 : 2009.04.14 22:10

안도현 시인, 북녘에나무보내기운동본부장

시론

평양 거리는 벚나무가 하나도 없다. 살구나무 천지다. 가로수도 살구나무, 정원수도 살구나무다. 지난 4월1일, 살구꽃은 아직 꽃봉오리를 열지 않고 있었다. 분홍빛을 머금은 꽃망울이 막 터지기 직전이었다. 꽃망울 같은 소녀들이 삼삼오오 살구나무 아래를 지나가고 있었다. 모두들 붉은 스카프를 매고 있었다. 문득 소녀들의 신발 쪽으로 눈길이 쏠렸다. 하나같이 키높이 신발을 신고 있었다. 족히 7~8센티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운동화도 그랬고 검정 구두도 굽이 부쩍 높았다. 고것들 참! 올봄의 평양에선 키높이 신발이 대유행이었다. 소녀들은 빨리 키를 키워 꽃을 피우고 싶은 살구나무였다.

4월2일, 만경대 진달래도 손톱만한 꽃망울을 달고 있었다. 거기에서 진달래보다 많은 평양 시민들의 행렬을 만났다. 나는 눈이 마주치는 처녀들에게만 조금 더 큰 소리로 인사했다. 그러면 처녀들은 단박에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내 눈길을 피했다. 그렇게 피한다고 내가 안 볼 줄 알고? 나는 또 발개진 그이들의 귓등을 혼자 훔쳐보았다. 그 처녀들의 얼굴은 자르고 깎고 보태고 화장으로 덧칠한 남쪽의 얼굴이 아니었다. 숲 속의 진달래, 바로 그 얼굴이었다.

인공위성 발사를 앞두고 북쪽의 텔레비전 뉴스는 기대감으로 한껏 들떠 있었다. 그러나 평양은 평온했다. 4월3일, 드디어 사과나무를 심기 위해 버스를 타고 시내를 벗어났다. 들녘은 지평선이 보일 만큼 광활했다. 우리 일행이 당도한 곳은 평양시 력포구역 능금동. 1952년 한국전쟁 중에 김일성 주석이 과일농장을 일구라고 지정해준 곳이라 한다. 언덕은 물이 빠지기 좋게 비스듬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고, 사과나무를 심을 땅의 흙은 붉었다. 장수군농업기술센터 서병선 소장은 흙을 집더니 덥석 입에 물고 씹었다. 전북 장수군과 평양은 연평균 기온과 강수량이 거의 비슷해서 이보다 더 좋은 땅은 없을 거라며 최적지라 한다.

평양에 사과나무를 심는 일, 그것은 지난 4년 동안 갈망하고 준비해 온 일이었다. 남쪽에서 사과 묘목, 농기구, 재배 기술을 전수하고, 북쪽에서 땅과 노동력을 내놓는 일이 앞으로 3년 동안 지속된다. 올해는 1만주의 사과 묘목을 10㏊의 땅에 심는다. 남쪽에서 1000명 가까운 분들이 마음을 열고 지갑을 열어 북에 보낸 묘목이다. 1만주의 사과나무가 피워낼 꽃을 상상하는 일만으로도 심장은 붉은 사과 열매처럼 쿵쿵거린다.

이 키 작은 사과 묘목에는 4년 후에 한 그루당 100개의 사과가 열린다. 한 해에 100만알의 사과가 열린다. 100만알의 사과를 한 알씩 먹으면 북쪽 어린이 100만명의 입이 쩍, 벌어진다. 사과를 두 쪽으로 쪼개 나눠 먹으면 200만명의 입이 쪽, 벌어진다. 북쪽 어린이 200만명이 남쪽에서 보낸 사과를 먹었다고 집에 가서 말하면 이들의 부모 400만명의 입이 하, 벌어진다. 우리가 심은 사과나무는 적어도 20년 동안은 주렁주렁 열매를 낳는다.

4월4일, 우리는 예정대로 중국 선양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텔레비전에서는 뉴스 특보가 이어지고 있었다. 미사일과 인공위성 사이에서 갈팡질팡, 대북 제재와 대응 수위 사이에서 요란법석, 사실과 의구심 사이에서 온통 오도방정이었다. 나는 통일부의 발표대로 북에 체류하다 귀환한 84명 중 한 명이었으나, 나의 신변은 안전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에 1억그루의 나무를 심겠다고 공약했다. 이번에 1만그루를 심었으니 이제 9999만그루 남았다.

안도현 시인, 북녘에나무보내기운동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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