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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4.26 21:16 수정 : 2009.04.26 22:58

박경신 고려대 법대 교수

시론

구글이 유튜브의 게시 기능을 없애면서까지 실명제 적용을 거부하였다. ‘익명성이 웹의 정신’이라는 말은 틀렸다. 많은 카페나 웹사이트들이 이용자들 사이의 자발적인 약속에 따라 실명제로 운영되고 있다. 이번에 확대실시된 실명제는 강제적이라서 문제이다.

국민은 자신의 개인정보를 국가에게 공개하지 않을 사생활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국가는 형법 215조와 같은 “범죄수사에의 필요성”과 같은 특별한 공익이 있는 경우에만 사생활 및 사적인 정보의 공개를 강제할 수 있다. 신원 공개도 마찬가지다. 불심검문은 경찰관직무집행법 제3조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어떠한 죄를 범하였거나 범하려 하고 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떳떳하면 왜 실명 등록을 못하는가’라고 다그치는 실명제 찬성자들도 길거리를 걷는다는 이유만으로 신원 공개를 요구당하면 ‘내가 뭘 잘못했는데?’라고 불쾌해할 것이다. 인터넷실명제 반대자들의 심정이 바로 그런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전기통신사업법 54조에 따라 포털들이 모든 게시글에 붙어 있는 실명을 영장도 없이, 게시자에 대한 고지도 없이 수사기관들에 넘겨주고 있어, 실명이 스크린에 떠 있지만 않을 뿐 글쓰기를 할 때마다 실명을 국가에 등록하는 ‘순수 실명제’라고 봐야 한다.

물론 강제적 실명제가 필요할 때도 있다. 부동산실명제와 금융실명제는 사기 및 탈세의 위험성 때문이다. 자동차에 번호판을 달도록 하는 것은 자동차의 파괴성과 이동성 때문이다. 청소년 유해물을 보는 사람에게 성인 인증을 위해 주민번호를 강제하는 것도 이를 청소년이 보았을 때의 유해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글쓰기가 자동차 운전, 금융거래처럼 위험한 행위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익명의 글쓰기는 도리어 사상의 전파라는 공익적 구실을 수행해 왔기 때문에 ‘위험’이 있더라도 보호되어 왔다.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정권 시절 탄압을 피해 독립과 자유를 주장한 수많은 익명의 글들을 보라. <폭풍의 언덕> 저자 에밀리 브론테는 여성 작가들에 대한 편견을 피하기 위해 ‘Acton Bell’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이 밖에도 시대의 편견과 권력의 탄압을 피하여 자유로운 비평과 예술활동을 한 필명 사용자들은 ‘몰리에르’, ‘볼테르’, ‘졸라’, ‘트로츠키’, ‘조지 오웰’ 그리고 벤저민 프랭클린, 사드 백작, ‘오 헨리’, ‘조르주 상드’, 심지어는 아이작 뉴턴도 있다.

온라인 글쓰기라고 다를까? 온라인의 글은 수십만 수백만 명이 볼 수 있거나 퍼 나를 수 있지만, 이것은 게시자의 통제 밖의 일이며 방송과 달리 독자들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다. 독자의 반응이 폭발적이라고 하여 실명 등록의 부담을 지우는 것은 어떤 장르의 책이 잘 팔린다고 해서 갑자기 그 장르의 저자들은 모두 실명 등록을 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터무니없다.

인터넷 실명제 아래서는 불법 게시물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까? 어차피 의도적으로 불법 게시물을 올릴 사람들은 자신의 실명과 번호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의도하지 않고 불법 게시물을 올리는 자들은 어차피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합법적인 게시물을 쓰려는 사람들의 글쓰기가 줄어들 것이라는 사실이다. 감시를 받기 싫어서이다. 자제의 미덕이 아니라 강제된 위축이다. 자발적인 실명제 사이트에서 명예훼손이 적은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길거리 범죄를 막겠답시고 길을 걷는 사람들 모두에게 명찰과 주민번호를 달고 다니도록 강제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을 생각해 보라.

박경신 고려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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