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5.31 21:43
수정 : 2009.05.31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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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표 언론인, 전 <한겨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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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이 죄지은 사람도 살고 있는데 왜 죽어?” “서민의 진정한 친구를 잃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이다. 이런 이야기는 그가 살아 있을 때는 듣지 못했다. 귀가 따갑게 듣던 이야기는 “깨끗한 척하더니 이게 뭐야?”였다.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충격적인 사건을 당하고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졌기 때문일까?
그런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언론에 있다. 우리의 얼굴이 서로 다르듯이 사람들의 생각은 천차만별이다. 이런 다양한 생각 중 어느 것을 언론이 집어내어 보도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이것을 언론의 여론형성 기능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노 전 대통령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은 책임이 언론에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제 와서 언론은 검찰 내부와 주변에서 노 전 대통령 수사의 문제점이 거론되고 있다고 보도한다. 표적수사, 망신 주기 수사라는 말들도 나온다. 검찰이 일반 잡범 다루듯 낱낱이 혐의를 밖으로 들춰내면서 수사를 질질 끄는 동안 노 전 대통령은 여론의 비판에 노출되었고, 형사처분보다 더 가혹한, 사회적 비난이라는 징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뒤늦긴 했지만 당연한 지적이다.
언론은 이런 목소리들을 노 전 대통령이 살아 있을 때 반영했어야 한다. 검찰은 연일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혐의 사실을 자세하게 브리핑했다. 과거에는 없었던 일이다. 언론은 이를 받아 흡사 중계방송하듯이 자세히 보도했다. 검찰 발표에 대한 문제 제기는 야당의 입을 통해서만 전달되었다. 이런 문제 제기는 정치공세라는 반격에 맥을 쓰지 못했다. 검찰 발표에 대한 검찰 내부의 다른 의견들을 언론은 반영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이런 의견들은 자라지 못했다.
이런 보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목소리가 너무 작았고, 보수언론들의 고함에 눌려 잘 들리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보통사람들은 노 전 대통령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를 옹호하는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웠다. 친구들 사이에서 ‘노사모’ 아류라는 빈축을 살 것 같아 두려웠던 것이다. 이와 같은 두려움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균형 잡힌 평가를 회피했던 일부 언론인들 사이에서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만든 여론에 스스로 사로잡힌 꼴이다.
균형 잡힌 평가라는 것은 우선 대통령이라는 절대 권력자로서 유혹을 물리치고 청빈함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고려하는 태도다. 노 전 대통령은 평소 깨끗한 정치를 강조했으니, 그에 대한 평가가 좀더 엄격한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다른 대통령들과 비교하는 상대적인 관점이 없으면 가혹한 비판으로 나아가기가 쉽다. 부인이 박연차 전 회장의 돈을 받은 사실을 스스로 털어놨을 때 언론은 대부분 그가 모든 것을 고백했느냐는 문제를 제기하고, 책임을 가족들에게 돌리는 남자답지 못한 행동이라는 식으로 몰아갔다. 그 정도의 고백도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그가 처음이며,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평가한 보도는 거의 없었다.
언론이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책임을 고백하고 반성하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언론은 검찰을 비판함으로써 여론의 질책을 검찰 쪽으로만 쏠리게 만들고 있다. “나는 아니야”는 언론이 흔히 보이는 태도다. 비판의 칼을 언론이 쥐는 것은 언론이 분별력을 가지고 차별 없이 이 칼을 휘두른다는 전제로 정당화될 수 있다. 그래서 자기비판에도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언론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한 내부의 활발한 토론을 기대한다.
성한표 언론인, 전 <한겨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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