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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진/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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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고추장 세 통, 죽 세 봉지. 아버지는 브라질로 떠나는 아들에게 쥐여준 꾸러미가 또 마음에 걸렸다. 며칠 전에도, 그 며칠 전에도 아버지는 선수촌 정문에서 음료수 몇 개만 주고 돌아섰다. 아들은 지난 5월 아시아유도선수권 첫 경기 한판패로 쓰러질 때 정신을 잃은 이후 머리 통증에 시달렸다. “그동안 보약 한 재 제대로 못 먹여서….” 그놈의 돈은 가슴에 또 멍을 새긴다. 15일 경기 당일 아침. 아버지는 아파트 지하 사무실 텔레비전 앞에 혼자 있었다. 하루 걸러 서는 밤샘 야근. 신장이 좋지 않은 엄마는 그날도 일찍 식당일을 나갔다. 아들이 중학교 때. 엄마는 운동부 회비가 버거워 아들 숙소에서 밥짓는 아줌마가 되었다. 아들은 매트 위에 섰다. 정읍 시골에서 원시인처럼 맨발로 산천을 뛰던 그 개구쟁이. 자, 이로써 예상은 다 틀렸다. 누구도 열아홉 이 어린 선수가 73㎏급 결승까지 올 줄 몰랐으니. 5분 경기. 그리고 연장전. 찢어진 목에서 튄 피가 흰 도복에 몇 번이나 떨어진 즈음. 다리 잡아 상대를 넘긴 건, ‘왕서방’ 왕기춘이었다. 한국 유도 사상 최연소 세계선수권 우승. 아들은 고개 들어 ‘악!’ 외마디 함성을 질렀다. 아파트 지하실에 울린 아버지의 소리도 그러했을까? “체중 빼느라 고생한 얼굴이 화면에 나오는데…. 정말 울면서 봤지요.” 아버지는 단지 금빛 메달 때문만은, 정말 아니라고 했다. “작년 11월 내 생일이었죠. 선수촌에서 나와 소주 한 병 사갖고 와서는 ‘아버지, 오늘 같은 날 한잔 하세요. 제 잔 받으셔야죠’ 하더라고요. 어린애인 줄로만 알았는데. 브라질 떠나는 날에도 고추장 주고 가는데 이놈이 가지 않고 선수촌 정문에서 날 끝까지 보고 서 있는 거예요. 난 그만큼 못해 줬는데…. 그런 게 고마워서, 그래 눈물이 납디다.” 같은 날. 열아홉 동갑내기 신지애가 박세리도 이루지 못한 국내 골프 사상 첫 시즌 6승을 달성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멈췄다”며 깔깔 웃어넘긴 키는 155㎝. 그날 밤. 푹 쉬고 싶었을 텐데, 지애는 두 동생을 데리고 외식도 하고 영화도 봤다. 지애 아빠는 “대회 끝나고 오면 가장 첫 번째 하는 일이죠. 동생들 얼굴에 그늘이 없게. 지 엄마 노릇 하는 거죠” 라고 했다. 4년 전. 왜 그날 비가 왔고, 왜 그곳엔 25톤 트럭이 유령처럼 있었을까. 아님 왜 하필 엄마 차가 거길 지나쳤는지 하소연해야 하나? 엄마는 숨을 거뒀고, 동생들은 살아난 게 다행이라고 하기엔 너무 크게 다쳤다. 아빠는 시골의 85만원 월급 목사였다. 집을 정리했다. 지애는 1년 동안 병실 간이침대에서 먹고 자고 등하교를 했다. 퇴원 뒤에도 보증금 1000만원, 15만원짜리 월셋방 생활. 아빠는 1승, 1승…. 딸의 그런 승리가 기특한 건 아니라 했다. 아빠는 악몽 같은 그날을 되짚었다. “나도 반쪽을 잃었지만, 제일 걱정은 아이들의 충격이었죠. 그런데요, 눈감은 엄마 시신을 본 어린 지애가 ‘아빠, 엄마 얼굴 보니 참 평안해 보여요. 천국 가셨을 거예요’ 하고 날 위로하는데…. 어쩜 저렇게 강할까 싶었죠. 아마 2년 전이죠, 문자가 온 게. 아빠 내가 잘해서 가정을 일으키겠다고, 아빠 사랑한다고.” 20일 귀국한 왕기춘은 “부모 잘 만났으면…”이라고 말하는 그 부모님께 “날 기죽지 않게 키워 주시고, 날 태어나게 해주셨으니 감사한 분들”이라고 했다. 매년 수천만원 기부하는 신지애. “난 동생들과 아빠에게 힘이 되어야 한다”며 생긋 웃었다. 가족을 가슴에 품는 것. ‘왕서방’과 ‘꼬마 천사’는 이것이 한판승과 홀인원보다 더 상급 기술임을 느낀 듯하다.송호진/스포츠부문 기자 6S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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