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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정수 대기업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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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10년 전 외환위기 때는 금융관료들이 다들 자기 몸을 던졌는데, 지금은 책임지고 난국을 수습하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전직 고위 금융관료가 한 말이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고문 기술자’처럼 은행의 팔 비틀기를 즐겼던 관치 기술자들이 다시 고개를 들 정도로 경제 상황은 심각하다. 금융위기의 불이 실물경제로 옮아 붙으면서 금융경색과 실물경제 위축이 동시에 전개되는 복합형 위기가 본격화하고 있다. 은행의 위기는 제2금융권 위기로 이어지고, 이것은 다시 물귀신처럼 실물경제를 깊은 물속으로 잡아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빨리 끊어야 한다. 정부는 은행에 총구를 겨누었다. 정부 지원을 받고도 어려운 기업들에 대출을 해 주지 않아 경제를 더욱 위기로 몰고간다는 것이다.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연일 은행들을 압박한다. 은행들은, 기초여건(펀더멘털)이 좋다던 한국 경제를 이 지경으로까지 몰고온 잘못에 대해선 제대로 시인한 적이 없는 정부가 자신들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는다고 불만이다. 지금 은행들의 금고문을 무조건 활짝 여는 것이 해법일까? “문제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부실이 추가로 더 생길까봐 무서운 거죠.” 한 시중은행 고위임원의 고백이다. 중소기업의 경영난과 가계 부실이 겹치면서 은행의 연체율이 치솟고, 건전성 지표인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은행 입장에서 보면 신규대출은커녕 기존 신용한도를 줄이고, 부실위험이 있는 대출은 조기에 회수해야 할 판이다. 하지만 정부는 강경하다. 은행에 대한 유동성 지원 대가로 맺는 양해각서(MOU)에 실물경제에 대한 지원방안을 반영하라고 압박한다. 코가 꿰인 은행들이 정부와의 약속을 지키려면 손해를 감수하고 대출을 늘려야 한다. 은행도 이를 잘 알지만, 정부를 상대로 그런 얘기를 할 용기 있는 금융인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2003년 카드사태 때 정부의 지원요구에 딴소리를 냈던 김정태 국민은행장은 결국 쫓겨나지 않았던가? 그럼 올바른 해법은 무엇인가? 정부는 무조건 은행의 팔을 비틀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대출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 같은 금융전문가들은 은행들이 주식이나 후순위채권을 발행해 자기자본을 늘리도록 정부가 ‘증자명령’을 내려야 한다고 제안한다. 은행의 자기자본이 늘어나야 자기자본비율이 올라가고 대출 여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시장 상황에서 증자가 쉬울 리 없다. 결국 정부가 팔을 걷고 나서야 하는 상황이 예견된다. 우선 한국은행이 은행의 주식과 채권을 사 주는 방법이 있다. 외환위기 때도 한은이 외환은행의 주식을 사 준 전례가 있다. 두번째로는 예금보험공사 기금으로 사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카드사태 때처럼 산업은행을 동원하는 것이다. 정부가 자꾸 국민연금을 동원하려는 것은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정부가 은행 증자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평시에는 생각하기 어렵다. 또 세 가지 방법 모두 큰 부담이 따른다. 한은의 개입은 결국 나중에 물가상승 압력으로 작용한다. 예보가 나서려면 먼저 법을 바꿔야 한다. 현행법에서는 부실 금융기관으로 지정되지 않으면 지원을 할 수 없다. 산은을 동원하는 방식은 민영화를 상당 시간 미루는 결단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부담을 무서워할 한가한 때가 아니다.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 좋은 의미의 관치 말이다. 하지만 정부가 무조건 완력을 휘두르는 것은 현명한 관치가 아니다. 관치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곽정수 대기업 전문기자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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