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9.04.07 22:52 수정 : 2009.04.07 23:16

김경애 사람팀장

한겨레프리즘





1994년 ‘서울의 달’이라는 드라마가 장안의 화제였다.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두 배우, 한석규와 최민식씨의 출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전작 ‘아들과 딸’로 막 이름을 알린 한석규씨는 시골에서 맨주먹으로 상경한 제비족 ‘홍식’으로 ‘한탕’을 꿈꾸다 쓰러지는 청춘의 좌절을 실감나게 연기해 일약 인기 스타로 떴다.

마지막 회 촬영 날, 인터뷰를 하려고 여의도 <문화방송> 스튜디오 앞에서 한석규씨를 만났다. 그때만 해도 <한겨레> 지면에서 연예인 기사를 거의 다루지 않던 시절이었고, 나로서도 인기 스타 취재가 거의 처음이어서 내심 긴장을 했다. 마침 마지막 회에서 죽는 연기를 앞둔 순간이어서인지 그 역시 무척 긴장한 표정이었다. 당연 대화는 썩 매끄럽게 풀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우직한 막노동꾼 ‘춘섭’ 역으로 함께 인기를 끌던 최민식씨가 끼어들면서 취재는 갑자기 사회부 사건기사 방향으로 흘러갔다.

“한겨레신문은 바른말 하는 신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우리 연예인들의 억울한 사연 좀 들어 주세요.”

그는 그때 신인 연기자들이 너나없이 당하고 있는 ‘광고 사기’, ‘계약 사기’, ‘출연료 사기’ 등등의 사례를 속사포 쏘듯 털어놓았다. 지금처럼 매니지먼트 시스템이 갖춰지기 전이었으니, 유명 배우들조차도 종종 이른바 ‘딴따라의 설움’을 피하기 어려웠다.

“저는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 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요즘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탤런트 고 장자연씨가 유언처럼 문건에 남긴 이 문장을 보는 순간, 최민식씨의 ‘호소’가 새삼 떠올랐다. 장씨의 죽음은 연예인을 둘러싼 어두운 유혹의 세계가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5년의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고, 그사이 한국 경제는 세계 10위권에 오르내릴 정도로 성장했으며, ‘한류’로 상징되는 대중문화 산업도 그 대열에 당당히 앞장서 왔다고 갈채를 받고 있다. 그런데도 그 주역인 연예인들의 처지는, 화려한 조명 뒤에서 오히려 그늘이 더 깊어진 건 아닌가. 더욱이 장씨와 같은 젊은 여성 연예인들에게는 돈과 자존심뿐 아니라 ‘몸’까지 요구하는 이중 삼중의 ‘덫’이 가해지고 있는 것이다.


자살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그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무성한 소문 속에서 고인의 이름과 사진은 생전보다 훨씬 더 널리 알려지고 있지만, 세상의 관심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이나 연예인 권익 문제보다 이른바 ‘성상납 리스트’에 쏠려 있다. 마침내 한 용기 있는 야당 의원이 국회에서 ‘리스트’의 일부를 공개했는데도, 해당 언론사는 잡아떼기 바쁘고, 경찰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묘기만 부리고 있다.

사실 분단과 고도성장이라는 두 개의 시한폭탄을 안고 달려온 한국 사회는 유난히 ‘집단 스트레스’가 강하다고들 한다. 그래서 유명 연예인의 잇따른 자살 사건은 일회성 ‘깜짝 뉴스’가 아니라, 전 국민의 정서에도 충격과 후유증을 끼칠 수밖에 없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안타까워하는 우리의 모습은 마치 ‘집단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이제라도 제2, 제3의 장자연이 나오지 않도록 가해자를 분명히 밝혀 처벌을 받게 해야 한다. 그보다 더 절실한 것은, ‘힘없는 신인 배우들’의 권익을 보호할 사회적 장치를 만드는 것이다. 특히 여성 연기자들이 스스로 뭉쳐 손을 내밀고 여성단체와 시민사회가 그 연대의 손을 잡아 주는 건 어떨까. 그리고 이렇게 말해 주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사랑해, 죽지 마!”

김경애 사람팀장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한겨레 프리즘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