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4.21 22:45
수정 : 2009.04.21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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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 대중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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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큰어른’이 없다고들 한다. 불황과 경쟁에 가위눌려 바람 잘 날 없는 일상을 사는 이 땅의 장삼이사들이 흔히 꺼내는 말들이다. 덕망과 경륜으로 나라의 앞길을 내다보고 해법을 던져줄 원로는 어디 있느냐는 한탄이 쏟아진다. 아쉽게도 현 정부가 집권한 최근 1년여의 세태를 보면, 그런 어른 대신 ‘형님’이 처세의 표상으로 떠오르는 형국이다.
‘형님’이 뜬 배경에는 전·현직 대통령의 형들이 힘깨나 쓰면서 이런저런 사단을 빚은 사정이 있을 터다. 형님의 논리는 이기적이며 배타적이다. 자기 피붙이나 의리를 나눈 특정 지역·무리들에 얽힌 대소사는 세심히 챙기지만, 그 바깥 무리들은 물리치거나 저주하고 외면한다. 좀더 저열한 수준으로 내려가면 그것은 결국 ‘보스’주의, ‘조폭’의 비논리적 논리로 변질된다. 중국 사서인 <후한서>의 ‘당동전’은 후한 말기 왕실 환관, 외척, 선비들이 뒤엉켜 싸우며 자기편 밖 세력은 무조건 배척했던 말세적 행태를 ‘당동벌이’(黨同伐異)로 함축했다. 지금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건 어른의 어루만짐 대신 좁은 명분에 갇혀 줄서기를 강요하는 숱한 형님들의 ‘당동벌이’에 끌려다녀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느닷없이 형님론을 꺼내는 건 기실 문화계의 어른들 모임이자 문화유산의 마지막 보루라는 문화재위원회에 맺히는 여러 가닥의 걱정들 때문이다. 오는 25일 임기가 끝나는 현 문화재위는 지난 2년간 문화재 정책 최고 심의기구의 위상을 되묻게 하는, 어른답지 못한 행보를 잇달아 보여 왔다. 기억에도 생생한 지난해 8월 옛 서울시청 태평홀 철거 사태 당시 문화재위는 청사를 지켜야 한다며 사적 가지정을 했다가 결국 시 쪽과 타협해 지정을 철회하는 수치스런 첫 기록을 남겼다. 그 뒤 태평홀은 해체 뒤 시청 터 지하에 묻어 보존한다는 코미디 같은 결론 아래 지상에서 사라졌다. 최근엔 한 수집가가 보물 지정을 신청한 도자기를 심의하면서 전·현직 문화재위원들이 엇갈리는 진위작 판정을 내려 서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며 반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26일 2년 임기를 시작하는 새 문화재위는 위원 수를 기존 120명에서 80명으로 줄이되 참여 인사를 전문가 일변도에서 언론, 경제, 종교 등으로 다변화할 방침이라고 한다. 위원 수가 너무 많다는 비판이 있었고, 새 위원을 뽑을 때마다 로비설 등이 돌았던 터라, 개편 취지는 언뜻 수긍할 만하다.
정작 우려되는 것은 대운하 그림자가 아롱거리는 정부의 4대강 정비 개발 사업에, 새로 뽑힐 위원들이 들러리를 설 것이란 추측이 갈수록 퍼져 간다는 데 있다. 지난 1~2월 전국 23개 발굴기관들은 2억9435만여㎡나 되는 4대강 주변 개발 예상 지역에 대한 문화재 지표조사를 끝마친 뒤 지난달 약식 보고서를 냈다. 졸속 조사란 비판 속에서도 무려 1036곳에서 유적들이 나왔다. 사업을 무분별하게 벌일 경우 이들 유적이 파괴될 것이란 경고나 다름없다. 하지만 야당, 시민단체 등은 문화재위 개편으로 경제 분야 등의 친정부 인사들이 위원으로 들어와 보존보다 개발을 용인하는 거수기 구실을 주도할 공산이 크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화재위원들은 문화재청 관료들이 여론을 수렴해 선정한다. 현 상황에서 위원 인선이 정권의 심중에 눈과 귀를 쫑긋 세운 관료들의 입김에 휘둘릴 것이란 불안감을 지우기 어렵다. 이미 어른들의 권위에 금이 간 문화재위가 인선조차 정치색 논란에 휘말린 현실은 엄중하다. 문화재위마저 형님들의 ‘당동벌이’에 흔들린다면, 문화유산의 미래는 없다.
노형석 대중문화팀장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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