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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6.02 21:47 수정 : 2009.06.02 21:47

노형석 대중문화팀장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고독은 욕되지 않으나/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이란 문구로 시작하는 청마 유치환(1908~1967)의 시 제목을 불현듯 떠올린 건 먼지바람 속에서 한 전직 대통령의 동상 앞에 맞닥뜨린 순간이었다.

살바도르 아옌데(1908~1973). 뿔테 안경 낀 그의 동상은 칠레 국기를 휘감고 있었다. 세계 처음 선거로 사회주의 정권을 출범시킨 남미 칠레의 대통령, 3년여 만에 군부 쿠데타로 숨져간 비운의 정객. 남국의 태양빛이 직사로 쏟아지고, 한켠에선 흙바람 부는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대통령 관저(모네다궁) 뒤편 제헌광장에 그는 서 있었다.

거장 로댕이 빚은 녹아내릴 듯한 작가 발자크 상처럼 아옌데 동상은 칠레 국기와 한 몸으로 녹아내리며 한 발짝 앞으로 내딛고 있었다. 동상엔 ‘칠레가 가야 할 길, 나는 그 길을 확신한다’는 어록이 새겨졌고, 그 아래 검둥개가 늘어져 자고 있었다. 길잡이를 한 유학생은 동상 옆에 솟은 국기 게양대 깃봉의 대열을 가리키며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거들었던 군장성들을 상징한다더라”고 했다. 진보 정치가와 그를 죽인 우익 쿠데타 군인들의 상징이 공존하는 광장이라니.

지난 1월 산티아고의 공연축제 ‘아밀 페스티벌’을 취재하러 갔다가 틈을 내 들른 아옌데 동상 주변의 나른하고도 울적한 풍경은 청마의 시와 얽힌 잔상이다.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는 1960년 3·15 부정선거 직전 쓴 참여시다. 자유당 정권의 말기적 광기에 맞서 뽑아낸 절창을 왜 아옌데의 상 앞에서 생각했던 것일까. 다만 시와 어우러지며 또렷이 눈에 새겼던 풍경들이 있다. 시내 곳곳에 현실로 존재하는 아옌데의 얼굴들. 서거 28년 만에 세워진 동상 말고도 혁명가 체 게바라의 실루엣처럼 흑백 윤곽선만 되살린 아옌데의 얼굴이 포스터·판화 등으로 건물벽, 뒷골목 바닥 등에 붙어 있었다. 태평양을 바라보는 항구 발파라이소 언덕의 공산당 본부 벽에도 아옌데의 판화가 찍혀 있었다. 함께 찍힌 문구가 기억난다. ‘그는 언제나 돌아오는 역사다.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은 2001년 테러의 상징어가 된 9·11 쿠데타 때 그는 ‘화염 속에서 위대한 정신을 품고서’(그의 친구였던 시인 네루다의 묘사) 모네다궁에서 쿠데타군과 대적한다. 최후 라디오연설에서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이라고 유언한다. 총격전 뒤 그의 주검 위를 지나친 쿠데타군이 포고를 발표하며 16년간 군사독재를 시작했을 때 진보의 노래는 사람들 가슴속에 묻힌다. 청마 또한 시에서 노래한다.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에/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라…’

이 땅의 바보 대통령은 조금만 때를 타도 금방 더러워 보이는 진보의 도덕성이란 멍에를 지고 삶을 등졌다. 정치적 타살이란 세론이 있지만, 쿠데타군과 맞서다 숨진 아옌데의 최후와 감도가 다르다. 역사는 진공청소기와 같다. 죽어서 역사가 된 바보 대통령의 가치와 이상은 복잡다기한 현실과 한 인간의 구차한 흠결까지 빨아들여 버린다. 그에 대한 배신감, 괴물 정권을 낳은 진보세력의 오류까지 휩쓸어 가버린 ‘바보사랑’의 실체를 사람들이 깨닫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뜨거운 노래…’의 마지막 시구를 눌러 적는다.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노형석 대중문화팀장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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