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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애 사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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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연아처럼’. 음악이 멈추고 그가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린 순간 시작된 ‘피겨 여왕’의 즉위식은 한달 전에 끝났지만, ‘여왕 따라하기’ 열풍은 나라 안팎에서 날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걸이부터 운동화까지, 눈화장법에서 치아교정까지, 그의 모든 것을 따라하려는 패션 열기 속에 그의 이름을 딴 물품이 벌써 6000개를 헤아린다고 한다. 2월에만 그가 모델로 출연한 방송광고가 무려 16편, 단일 모델로는 국내 티브이 광고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란다.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연예인 톱스타들도 명함을 못 내밀 정도로 압도적으로 높은 덕분이다. 미국의 시사매체인 <이그재미너>에서 김연아 선수를 축구 황제 펠레, 농구 스타 야오밍 등과 함께 ‘21세기 스포츠 메가스타 5명’에 선정했다는 보도는 그의 가치가 어디까지 치솟을지 더욱 궁금하게 한다. 하지만 ‘연아를 낳았다’는 고대의 자랑이 황당했던 것처럼, ‘여왕을 낳은 나라’ 한국의 국격도 덩달아 높아진 듯 들뜬 여론들은 일종의 착시현상이다. 지난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계기로 쏟아져 나온 갖가지 여성 지표들은 한결같이 부끄러운 세계 최고 기록을 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의 경제력은 세계 10위권을 향하고 있지만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10년째 50% 언저리에서 제자리고, 여성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남성의 50~60%밖에 안 된다. 더구나 지난해 경기침체의 직격탄을 맞아 ‘백조’(여성 비경제활동인구)가 1042만명으로 사상 최다를 기록했다. 여성의 주당 평균 근무시간은 44.3시간으로, 남성(48.3시간)과 마찬가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가운데 1위다. 여성 권한 척도(GEM)는 조사 대상 109개 나라 중 61위, 성 격차 지수(GGI)는 134개 나라 중 115위다. 국회의 여성의원 비율은 세계 평균(18.8%)에도 못 미치는 14.7%로, 조사 대상 187개 나라 가운데 아프리카 가봉과 같은 81위다. 합계출산율이 세계 최저인 1.19명인데도 젊은 여성들의 결혼 기피와 출산 파업은 개선될 기미가 없다. 한편에선 신생아 4명이 태어나는 사이 태아 3명은 세상에 나오지도 못한 채 지워져 낙태율마저 세계 최고다. 한국 주부들의 우울증과 자살률 역시 세계적 수준이다. 여성문제를 둘러싼 논란들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최근 한 의사단체는 출산 장려를 빌미로 불법 낙태 시술 병원들을 고발하고 나서면서, 미혼모의 현실이나 여성 인권 보호대책은 고려하지 않아 여성계의 비난을 사고 있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 저널>의 한국 특파원이 기자간담회에서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부적절한 질문을 했다 해서 대변인과 시비를 벌인 끝에 욕설을 해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한국 여성의 낮은 취업률이 남성의 룸살롱 문화 때문 아니냐’는 그의 질문은 관료 접대 관행과 함께 비정규직이나 제도권 밖으로 내몰리는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을 아프게 드러내준다. 미 국무부는 지난 11일 발표한 ‘2009년 인권 보고서’에서 한국을 여성·장애인·소수민족을 차별하는 나라로 분류했다. 성폭행·가정폭력·아동학대도 심각한 문제이고, 매춘은 불법이지만 만연해 있는 상태여서 전년도와 비교해 나아지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한마디로 우리 ‘연아의 언니들’은 행복하지 못하다. 이제 막 스무살, 여성이 된 ‘연아 세대’에게 이런 부끄러운 세계기록들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면 그만큼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얘기다. ‘연아처럼’ 열풍이 패션 따라하기만이 아니라, 주눅들지 않는 ‘당당 바이러스’로 퍼져가길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경애 사람팀장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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