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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5.15 19:36 수정 : 2011.05.15 19:36

김진철 esc팀장

소년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막노동꾼이었다. ‘뼈빠지게’ 일해도 3남매의 학비를 대는 일이 쉽지 않았다. 어머니는 장남인 소년에게 모든 걸 바쳤다. 돈 되는 일은 도둑질 빼고 다 했다. 어떻게 해서든 장남을 잘 키워야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이라 믿었다. 다치고 병든 남편의 치료비를 아껴 장남의 학비를 대고 참고서와 문제집을 사는 데 썼다. 소년은 공부를 곧잘 했다. 타고난 지능이 있었고 끈기와 인내심도 뛰어났다. 머리가 굵어질수록 제 어깨에 가족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압박감은 소년을 괴롭혔다. 결국 공부밖에 없었다. 남들 가기 어렵다는 명문대 법대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앞만 바라봤다. 친구들 연애사업 할 때 도서관에서 육법전서에 매달린 그는 재학 중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마지막 학력고사 세대다. 그에겐 할아버지의 재력은커녕 할아버지도 없었다. 무관심하거나 이해심을 가졌어야 할 아버지는 일만 하다 일찍 세상을 떴다. 어머니는 정보력을 갖출 틈도 없이 불굴의 생활력으로 일생을 버텨냈다. “이젠 개천에서 용 날 일 없을 거야. 요즘 이쪽에 들어서는 친구들, ‘강남’ 빼놓고 설명할 길이 없어.” 변호사가 된 소년은 “막차를 탄 셈”이라고 말했다.

요즘 ‘개천에서 용 되려고’ 주경야독하는 일은 무모해 보인다. 학원과 과외공부 없이 이름난 대학에 간다 해도 등록금이라는 장애물이 버티고 있다. 등록금 마련할 시간에 ‘스펙’을 갈고닦는 이들과의 경쟁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거의 유일한 계급상승의 길이었다는 ‘고등고시’도 있는 집 자제분들은 족집게 과외로 철저히 준비한다.

변호사가 된 소년이 20여년 늦게 태어났더라면 아마도 춤과 노래를 갈고닦았을지 모른다. 뼈빠지게 일해도 학원비를 댈 수 없는 아버지와 돈 되는 일이면 가리지 않아도 대학 등록금을 책임질 수 없는 어머니 밑에서, 똑똑한 소년은 ‘공부가 가장 쉬웠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타고난 외모가 있고 끈기와 인내심이 있었기에 춤과 노래, 연기를 연마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연예기획사들의 오디션에 참가해 빼어난 끼를 자랑하며 연습생 대열에 들어간 뒤 ‘아이돌 그룹’으로 티브이에 출연했을 것이다. 춤과 노래로 인기를 높이고 이어 티브이 예능프로그램에서 또는 영화관 스크린에서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해냈을 것이다. 인터넷 연예뉴스의 주인공도 됐을 터. 스캔들도 터지고 연기 논란도 빚어졌겠지만 잘사는 부자동네에 대저택 사들여 효자 노릇 한다는 미담 기사가 팬들을 감동시켰을 것이다.

우스갯소리일지언정, 유일하게 남아있는 ‘개천에서 용 될 일’이 ‘아이돌’밖에 없다는 이야기는 그냥 흘려들을 수 없다. 근대 시민사회에서 교육을 통해 이뤄져야 할 계층이동의 길이 모두 막혀버렸고 그나마 대중문화 분야를 통해 ‘사회지도층’이 될, 바늘구멍보다 더 좁은 유일한 방법은 ‘아이돌 고시’뿐이라는 뜻일 게다. 연예기획사의 연습생 모집 오디션에 전국 각지에서 청소년들이 몰리는 이유다. 영리한 부모들은 더 일찍 간파했을 터. 큰돈 들여 서로 고생하며 공부 경쟁시켜 봤자 대단한 결과를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이미 알아챘을 것이다. 티브이 오디션 프로그램이 유행하는 이유 역시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를 어쩌나. ‘아이돌 고시’에서도 벌써 막차 떠나는 소리가 들려온다. 실력과 끼를 바탕으로 정당한 오디션이 이뤄진다지만, 몇몇 아이돌 그룹의 송사가 벌어지며 기획사에서 연습생들의 집안 재력을 보기 시작했다는 말들이 떠돈다. 있는 집 애들이 돈에 덜 집착해 수익금 배분 싸움 가능성이 적다는 것. 자수성가 스토리는, 개천의 숱한 별들이 명멸해온 이 동네에서도 사라지려나 보다.

김진철 esc팀장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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