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10.04 19:31
수정 : 2011.10.04 19:31
|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
사람을 바꿔서
다양성을 잃을
우려가 있다면
연임하면 된다
헌법에도 사문화된 조항이 있다. 대법관 연임 조항이 그렇다. 헌법 105조 2항에는 ‘대법관의 임기는 6년으로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연임할 수 있다’고 되어 있지만, 1987년 개헌 이후 임기를 마치고 곧바로 다시 ‘연임’된 대법관은 아무도 없다. 임기 중, 또는 임기 한참 뒤 ‘중임’된 경우가 1988년에 몇 있을 뿐이다.
연임 제한은 이제 관행으로 굳어진 듯하다. 그리된 배경도 있다. 과거 법관 재임명은 사법부를 쥐락펴락하던 정치권력의 주요한 무기였다. 1971년 6월 국가배상법 위헌 판결을 내린 대법원판사 9명과, 10·26 사건에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내란죄 적용에 반대 의견을 냈던 대법원판사 6명은 모두 그 직후 연임에서 탈락했다. 대법관 연임은 “정부 시책에 적극 협조한” 이들에게 주어진 상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1993년 소장 법관들이 일부 대법관의 연임에 반대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대법관 단임’에는 또 다른 사정도 있다. 대법관 교체는 거의 연례행사다. 사법시험 동기생 가운데선 대법관이 대개 한둘씩 나온다. 대부분 고위 법관 출신이다. 배석 판사로 출발해 승진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다 마지막으로 한둘이 월계관을 받는 식이다. 그 자리를 서열과 기수에 따라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러다 보니 “제청권을 쥔 대법원장 주변 인사들이 6년씩 돌아가면서 대법관을 하고 퇴임 후 전관예우로 돈방석에 앉는, 천민자본주의적 시스템”이란 말까지 나온다.
이런 비정상이 당연시될 수는 없다. 지금은 사법부의 독립 못지않게, 사법부의 보수화와 관료화, 서열화가 더 큰 문제가 됐다. 그런 서열화와 관료화의 정점에 대법원이 있다면, 마땅히 바꿔야 한다. 대법원을 법관 승진체계에서 분리하는 것은 그 출발점이다.
사실, 법적 안정성이 중요하다면 지금 같은 사실상의 대법관 단임제는 어울리지 않는다. 대법원의 구성이 자주 바뀌면서 대법원 판결조차 미심쩍어하는 이들이 늘었다. 실제 판결이 금세 바뀌는 일도 잦다. 제대로 하기에 6년 임기는 턱없이 부족하더라는 전·현직 대법관의 술회도 있다. 미국·일본·독일·프랑스 등 우리 법체계가 영향을 받은 나라 가운데 정년 말고 최고법원 판사의 임기를 따로 정한 나라는 없다.
60살 안팎, 심지어 50대 초반의 퇴임 대법관은 사회적 낭비이기도 하다. 대법원 상고사건 수의 폭증에는 그런 ‘전관예우 대법관의 지속적 공급’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지난 7월 개정된 법원조직법이 대법관의 정년을 70살로 늘린 것도, 그런 상황을 더는 유지하지 말자는 사회적 합의 때문이겠다. 그렇게 정년이 연장된 터에 대법관 연임을 원칙으로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현실적인 필요도 있다. 올해와 내년 사이에 임기를 마치는 대법관 가운데는 보수적인 법원 분위기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많다. 대법원이 그나마 다양성을 갖췄다는 평가도 이들 때문이다. 그 후임 선정에도 다양성이 중시돼야 한다는 의견이 많지만, 현실적으론 쉽지 않다고 한다. 기수에 맞는 후임 여성 법조인이 적다거나, 비서울대 출신이 대통령의 모교인 고려대 말고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는 따위 이유다. 사람을 바꿔서 그렇게 다양성을 잃을 우려가 있다면, 굳이 바꿀 것 없이 헌법대로 연임하면 될 일이다.
그리하는 게 어렵지도 않다. 대법관 연임 절차가 따로 법률로 정해져 있지 않다지만, 법관 연임처럼 임명 때와 같은 절차를 거치면 될 것이다. 지난달 말 구성된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 규칙엔 외부 천거 혹은 대법원장의 지명으로 후보가 될 수 있게 돼 있기도 하다. 결심만 하면 된다.
yeopo@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