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6.17 19:13
수정 : 2012.06.18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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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아 스페셜콘텐츠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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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전 어느 일요일, 나는 산부인과 응급실로 달려갔다. 한참 논란중인 ‘응급피임약’ 처방을 받기 위해서였다. 평소 콘돔으로 피임을 해온 우리 부부가 간만에 ‘별’을 따기로 했는데 콘돔이 없었다. 남편을 철석같이 믿고 사랑을 나눴는데, 남편이 “찜찜하다”고 했다. 갑자기 ‘혹시 계획에 없던 셋째가 생기지 않을까’ 두려웠다.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보면서 남편은 인터넷을 찾더니 응급피임약 복용을 권했다. 인터넷에서는 응급피임약은 12시간 이내에 먹어야 피임률이 높으며, 고농도의 호르몬제제라 부작용이 많다고 했다. 그 짧은 몇시간 동안 내가 겪은 복잡한 감정을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임신에 대한 두려움, 남편의 안일한 피임의식에 대한 원망, 응급피임약 부작용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결국 고민 끝에 응급피임약을 처방받아 복용했다.
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사전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응급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재분류하겠다는 안을 내면서 사회적 논란이 거세다. 식약청은 과학적 근거와 외국 사례를 토대로 안을 냈지만, 피임약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의 건강권과 성적 결정권이다. 피임약을 사용하는 주체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피임에 대한 책임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있다. 현재 우리나라 피임문화의 문제 중 하나는 남성들의 여성 몸에 대한 무지와 안일한 피임의식이다. 응급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하면 안 그래도 안일한 남성들의 피임의식이 더 떨어질 수 있고, 그것으로 인해 여성들의 건강권이 심각하게 침해당할 수 있다. 우리 부부 역시 이번 논란을 통해 응급피임약의 심각한 위험성을 인지하게 됐다.
스웨덴은 2001년 응급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한 뒤, 2007년까지 응급피임약 판매량이 두 배로 늘었다. 같은 기간 낙태는 2000년 3만980건에서 2007년 3만7025건으로 20%가량 증가했다. 반면 사전피임률은 매년 감소하고 있다. 응급피임약은 최후의 수단이며 그것의 오남용이 여성의 건강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을 고려한다면, 응급피임약의 접근성을 높이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성문화와 피임문화는 외국과 많이 다르다. 부모들 대다수는 피임교육을 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하는 성교육에서도 피임법을 의무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많은 여성들에게 산부인과는 친숙하지 않은 장소다. 한편으로는 산부인과 진료 행태에 대한 불만도 많다. 20~30대 미혼 여성들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간호사가 “성관계 경험 있어요?”라고 묻는다든지, ‘뭔가 문제 있는 여자’처럼 보는 일부 의사들 시선에 불쾌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또 호르몬제제의 위험성에 대한 충분한 설명 없이 기계적으로 처방하는 의사에 대한 불신도 있다.
이렇게 여러 문제가 얽혀 있는 상황에서 사전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하면, 과연 정부가 기대하는 것처럼 여성들의 원치 않는 임신이 줄어들고 여성의 건강권이 보장될까. 차라리 사전피임약을 전문의약품과 일반의약품으로 동시분류하면서 여성에게 선택권을 주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대신 피임약의 부작용을 더 알리고 의사·약사와의 상담 필요성에 대한 홍보를 강화할 필요는 있다. 피임 교육도 강화해야 한다.
이번 피임약 논의 과정에서 또 한가지 우려되는 점은 전문가들이 호르몬제제의 위험성을 너무 쉽게 간과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점이다. 영국의 유명 저널리스트 린 맥타가트는 <의사들이 해주지 않는 이야기>에서 호르몬제제가 20세기 최대의 의학적 실책이라고 주장했다. 구체적 피임법에 대해 널리 알리고, 남성들의 피임인식을 개선시키는 것이 더 시급하다.
양선아 스페셜콘텐츠팀 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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