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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11.20 19:18 수정 : 2012.11.20 19:18

최상원 사회2부 영남팀장

일제 강점기이던 1919년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통치방식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꿨다. 3·1운동의 결과였다.

3월1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들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된 비폭력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일본은 무자비한 진압과 동시에 조선총독을 사이토 마코토로 교체하는 등 사태 수습에 나섰으나, 연말까지 검거 인원만 1만9489명에 이를 만큼 독립을 염원하는 열기는 꺾이지 않았다.

결국 일본은 3·1운동의 기운을 가라앉히기 위해 문화정치라는 새로운 정책을 내놨다. 식민지 통치방식이라는 본질은 무단정치와 마찬가지이지만, 무단정치보다 유연하고 세련된 통치기법이었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제외하면 한글신문을 허용하지 않던 언론정책에도 변화가 생겨 다음해인 1920년 초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글신문의 발행을 허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탄생한 것이 창간 1년 만에 폐간한 <시사신문>과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3대 민간신문이다.

당시 조선총독부 제2인자이던 미즈노 렌타로 정무총감은 “불을 때는데 굴뚝이 없으면 솥이 파열한다”라고 민간신문 발행을 허용한 이유를 설명했다. 식민지 국민에게 ‘언론’이라는 불만 배출구를 제공함으로써 식민지 통치를 원활히 하겠다는 것이다. 여러 단체와 개인이 신문을 발행하려 신청했으나 3개 신문만 허용한 것은 언론이 ‘굴뚝’ 그 이상의 구실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조선총독부의 방침 때문이었다.

하지만 창간 초기인 1920년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조선총독부의 기대와 달리 오히려 솥이 벌겋게 달도록 불을 때는 구실을 종종 했다. 이 때문에 조선총독부의 기사 검열 과정에서 1920년대 동아일보는 304건, 조선일보는 332건의 기사를 압수당했다. 신문을 아예 제작하지 못하는 정간 역시 동아일보는 2차례, 조선일보는 4차례를 당했다. 심지어 1925년에는 두 신문 모두 50여건씩 기사를 압수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1930년대 통틀어 기사 압수 건수가 동아일보 89건, 조선일보 82건에 불과했다. 1930년을 제외하면 두 신문 모두 10건 이상 기사를 압수당한 해가 한번도 없었다. 조선총독부의 기사 검열이 1930년대 들어 더욱 가혹해지고 엄격해졌음에도 압수 건수가 오히려 줄어든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언론 스스로 그 상황에 길들여졌기 때문이었다. 조선총독부 검열에 앞서 언론 스스로 자기검열을 했고, 압수될 만한 기사나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 만한 기사를 사전에 걸러냈다. 반대로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기사를 앞다퉈 다뤘고, 조선총독부에 충성경쟁을 벌였다. 독자와 광고주 입맛에 맞는 기사를 찾아다녔고, 경쟁지의 실수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두 신문은 1940년 폐간당하고 말았다.

70년도 더 지난 케케묵은 역사를 지금 와서 다시 거론하는 것은 오늘날 언론 현실이 70여년 전 그때의 모습과 결코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언론의 자기검열은 더욱 강화됐고, 독자와 광고주에 대한 눈치 살피기와 충성경쟁 역시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감시와 비판이라는 언론 본연의 임무는 제쳐놓더라도 ‘굴뚝’ 구실은 제대로 하고 있을까? 만약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벌겋게 달아오른 솥이 폭발할 것이다. 언론 스스로 언론의 문제를 바로잡지 못한다면, 결국은 국민이 직접 나서 바로잡으려 할 것이다. 어쩌면 군불 때는 시대는 지나갔으니 이제 굴뚝 같은 것은 아예 필요 없다며 언론을 부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최상원 사회2부 영남팀장 c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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