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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2.17 19:24 수정 : 2013.02.17 19:24

이형섭 국제부 기자

지난 1월 프랑스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뜨겁게 포옹하며 “당신네 나라를 흠모한다”고 말했다. 그가 러시아를 흠모하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소득수준에 관계없이 13%밖에 되지 않는 소득세율이다. 하지만 그는 소치에서 여권을 받은 뒤로 다시는 ‘흠모하는’ 러시아를 찾지 않고 있다. 그는 여전히 벨기에와 프랑스의 집을 오가며 살고 있고, “러시아에 통나무집을 짓고 살겠다”는 말만 계속할 뿐 이를 실행에 옮기지 않고 있다.

그럼 러시아의 부자들은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통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러시아의 백만장자들은 경쟁적으로 런던·뉴욕·캘리포니아에서 집을 사들이고 있다. 전세계 백만장자들이 낮은 세율에 반해 모스크바로 몰려들고 있다는 소식 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다.

‘세금을 올리면 부자들과 기업들이 떠난다.’ 우리가 수십년간 들어온 말이다. 과연 사실일까. <뉴욕 타임스>가 집계한 최근의 연구 몇 건은 이 말이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미국 세금경제정책연구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부자들의 이주 원인 중 세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극히 미미하다. 미국에서 ‘부자 증세’가 부자들을 떠나게 만든다는 가장 중요한 사례로 언급되는 메릴랜드주가 대표적이다.

메릴랜드주는 2008년 부자 증세를 단행했지만 2009년 부자들한테서 거둬들인 총 세금액이 되레 줄어들었다. <월스트리트 저널> 등 미국 매체들은 신이 나서 ‘메릴랜드에서 백만장자 실종’이라는 식의 기사를 쏟아냈다. 하지만 세금경제정책연구소는 2009년에 메릴랜드주를 떠나거나 사망한 백만장자는 364명으로, 부자 증세 이전인 2007년과 똑같았다는 것을 밝혀냈다. 메릴랜드의 백만장자 수는 이사를 오거나 소득이 늘어나는 등의 이유로 그해 도리어 1500명이 늘어났다. 총 세금 징수액이 감소한 것은 금융위기와 주식시장 약세에 따라 부자들이 버는 돈 자체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스탠퍼드대학의 크리스토벌 영 교수의 연구 결과도 비슷한 결론을 보여준다. 2005년 ‘백만장자 증세’가 시행된 캘리포니아주에서 연소득 200만달러 이상의 부자들이 떠나는 비율은 도리어 줄어들었다. 영 교수 또한 세금은 부자들의 이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부자들이 세금이 높은 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부자는 그 지역에 살기 때문에 그만한 소득을 올릴 수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며 부자가 된 사람이 세금이 높다고 다른 지역으로 가게를 옮길 것인지를 생각하면 결론은 간단하다. 그 사람의 소득은 본인이 축적해 온 커리어(경력)와 인간관계의 총합이다. 이는 기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세금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최근 스위스에서 기업 최고경영자의 임금을 억제하는 법안이 국민투표에 부쳐지자 기업계는 “스위스를 떠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세율 인상이나 기업 총수의 비리 수사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우리나라 재계가 항상 읊는 레퍼토리 그대로다. 과연 그럴까. 삼성이 한국을 떠나 러시아로 옮길 수 있을까.

곧 출범할 박근혜 정부가 이례적으로 낮은 지지율을 보이는 데는 복지 논쟁 탓이 크다. 이미 기초노령연금에다 4대 중증질환 진료비 문제까지, 정부 출범도 하기 전에 국민들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줬다. 알렉산더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푼 것처럼 ‘증세’라는 칼을 빼들지 않는 한 엉킨 복지의 실타래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 미신을 벗고 부자와 기업들한테 “세금 내기 싫으면 떠나라”고 외칠 배짱과 용기를 박근혜 당선자가 갖길 바란다. sub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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