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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4.07 19:31 수정 : 2013.04.07 19:31

이유진 문화부 기자

조명이 켜지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모델들이 잘록한 허리에 손을 얹고 자신감 있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쏟아지는 찬사 속에 굽 높은 스틸레토힐을 신은 한 모델의 발목이 일순 휘청이는 것도 같았다.

지난달 25일부터 30일까지 서울시가 주최한 2013년 춘계 서울패션위크 행사에 다녀왔다. 젊고 발랄한 신진 패션디자이너부터 뉴욕이나 파리에서 호평을 받아온 중견 디자이너까지 사이좋게 아름다운 가을·겨울옷을 선보였다.

옷만큼이나 도드라진 점이 있었으니, 모델들의 깡마른 몸매였다. 쇼장 곳곳에서 “몸이 탐난다”는 얘기들이 낮게 새어나오곤 했다. 그러나 무거운 모직코트는 모델들의 앙상한 팔다리가 지탱하기엔 너무 버거워 보일 지경이었다.

비단 모델뿐 아니라 한국인들은 유독 날씬하다는 ‘칭찬’을 많이 듣는다. 다이어트 식품으로 각광받는 고추장·김치를 많이 먹어서라기보단 마른 몸매를 강조하는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여성의 경우 44사이즈도 모자라 33사이즈인 연예인이 수두룩하고, 다이어트 제품 시장 규모가 2조원이나 된다는 불확실한 통계까지 신빙성 있게 거론된다. 건강을 위한 1일1식이 유행이라지만, 몸매 유지를 위한 한 방법으로 ‘굶기’가 각광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몸 관리는 이제 여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어서 남성들도 가슴이나 복부 관리 열풍에 뛰어들었다. ‘마른 몸’, ‘예쁜 얼굴’, ‘풍성한 가슴과 엉덩이’ 등이 여성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남자 또한 누구나 자본을 동원해 ‘초콜릿 복근’, ‘우람한 팔뚝’, ‘섬세한 등 근육’을 가꿔야 하는 시대가 됐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더니, 미용 성형은 이제 너무 대중화돼 웬만한 중산층 동네엔 본령인 치료보다 미용 시술을 반기는 병원이 부지기수고, 한의원들까지 한방 미용성형이란 장르를 개발했다. ‘성형 공화국’의 국내 수요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정부는 ‘의료 한류’라는 이름으로 성형산업의 해외진출, 외국인 성형 환자 유치에 발벗고 나섰다.

‘개념 미술가’로 알려진 미국의 바버라 크루거는 <당신의 몸은 전쟁터>라는 포스터로 몸 관리에 대한 사회 통념을 맹비난한 바 있다. 우리 몸은 매 순간 전쟁을 방불케 하는 결단과 실행에 시달린다. 저염식과 저혈당식을 유지하며, 새로운 건강지식과 체조법을 학습해야만, 나태하기 때문에 뚱뚱하다는 비난을 면할 수 있다. 타인의 몸을 손쉽게 비평하는 건, 나 또한 예쁜 몸을 만들어야 한다는 문화적 통제 아래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끝없이 내 몸매를 관찰하고 식습관을 관리해야 ‘쪘네 빠졌네’ 하는 비평에서 합격점을 받아내며 사회의 성원권을 유지할 수 있다.

최근 약간의 변화상도 있긴 하다. 미국 배우 멀리사 매카시는 ‘뚱녀’ 캐릭터로 유명하지만 사랑스런 여주인공 자리를 꿰찼고,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아델은 통통한 몸매인데도 “(날씬한 몸매로 엉망인 앨범을 만드느니) 차라리 1톤의 몸무게로 대단한 앨범을 만들겠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미국 록그룹 ‘가십’의 보컬인 베스 디토는 몸무게가 100㎏에 육박하지만 패션 아이콘으로 유명하다.

물론 ‘뚱녀·뚱남’이 아름다움의 궁극이 되는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80년 이상 살면서 죽을 때까지 젊고 팽팽하고 날렵한 몸 상태를 유지한 사람은 없었다. 끊임없이 전략과 전술을 수정하고 수행해야 하는 잔혹한 몸의 전쟁터에서 지금껏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었다는 것만이 유일한 진실이다. 나는, 우리는, 인류는,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다. 단지, 어쩌면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도전과 응전을 멈추고 포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이유진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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