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4.21 19:07
수정 : 2013.07.29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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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사회부 사건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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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 랭이라는 고유명사가 나의 눈과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지난해 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제주 강정마을의 구럼비 바위를 해외 명품에 비유하며, 우리 곁에 있는 소중한 것을 있을 때 잘 지키자는 발언이 기사로 나왔을 때다. 그 뒤로 낸시 랭은 정치적 퍼포먼스를 자주 했다.
이때 아무개가 등장한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면 그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될까봐 차마 그렇게 못하겠다). 아무개는 낸시 랭과의 인터넷 토론에서, 영향력이 큰 연예인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정치 얘기를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고, 낸시 랭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누구든 표현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반박했다. 편견과 독단으로 가득 찬 아무개의 논리는 낸시 랭의 상식적인 질문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두 사람은 닮은 점이 있다. 둘 다 유명해지고 싶어하고 성공하겠다는 열망이 강하다. 그런데 목표를 이루려는 방식은 많이 다르다. 낸시 랭이 밝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데 반해, 아무개는 어두운 얼굴로 남들을 저주하는 데 매진한다. 낸시 랭이 글로벌하고 개방적이며 진보적인 이미지라면, 아무개는 우물 안 개구리에 아집으로 똘똘 뭉친 수구의 이미지다.
토론 이후 아무개는 낸시 랭에 대한 악담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얼마 전에는 낸시 랭 가족사의 비밀을 폭로한 뒤 대단한 특종을 한 듯 득의양양했다. 표적을 정해놓고 사생활 털기 좋아하는 ○○일보가 요즘 소설가 이외수의 과거사를 털고 있는 것처럼 참 비열하고 치사한 짓이다. 망신주기와 낙인찍기라는 수법도 똑같다.
일부 몰지각한 누리꾼들은 낸시 랭을 비난하는 엄청난 양의 이메일 폭탄을 영국 비비시(BBC)에 보내, 비비시의 낸시 랭 초청 행사를 무산시켰다. 정치에 관심을 둔 대가로는 너무 가혹하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시대착오적 공세 앞에서 좌절했던가.
낸시 랭이 비비시로부터 초청받은 ‘거지여왕 퍼포먼스’는 2010년 낸시 랭이 영국에서 한번 한 적이 있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생일 행사에서 구걸함을 들고 거지 행세를 하며 실제로 적선을 받다가 보안요원으로부터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낸시 랭은 이 퍼포먼스를 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개인이 국가가 되는 거야. 원 퍼슨(한 사람), 원 컨트리(한 나라). 거긴 사랑, 평화, 예술이 넘치는 나라, 계급 없는 나라.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겠지? 상관없어. 하지만 누구든 그런 나라에 살고 싶지 않겠냐?” 존 레넌이 ‘이매진’에서 노래한 유토피아다. 비비시가 낸시 랭을 공식 초청했다는 건 영국이 이 퍼포먼스의 가치를 인정했다는 얘기다. 21세기 한국 사회는 이런 몽상마저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낸시 랭의 정치 성향을 굳이 정의하면 리버럴 정도 되겠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자유로운 영혼이 보기에 대한민국은 지나치게 답답하고 완고하다. 시쳇말로 구리다. 특히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19세기 수준이다. 낸시 랭은 연예인(혹은 예술가)의 정치적 발언을 터부로 여기는 사회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그의 베네치아 비엔날레 첫 퍼포먼스 제목이 ‘터부 요기니’다. 터부 깨기는 예술의 본령 아닌가!) 낸시 랭이, 박근혜 포스터를 길거리에 붙였다가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팝아티스트 이하를 응원하는 것도 이래서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낸시 랭은 표현의 자유 쟁취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박경신 고려대 교수의 대중적 판본이다.
낸시 랭씨. 아무개가 원하는 건 당신의 입을 막는 겁니다. 당신이 말했듯이 함부로 지지 마세요. 당신의 몽상을 응원하는 사람, 여기 하나 추가요~.
이재성 사회부 사건데스크
san@hani.co.kr
‘낸시 랭과 아무개의 경우’ 칼럼 관련 반론보도
<한겨레>는 지난 4월22일치 오피니언면에 ‘낸시 랭과 아무개의 경우’라는 제목으로 낸시 랭과 주간 미디어워치 변희재 대표에 대한 칼럼을 게재하면서, ‘낸시 랭 가족사의 비밀을 폭로한 뒤 대단한 특종을 한 듯 득의양양했다’, ‘아무개가 원하는 것은 낸시 랭의 입을 막는 겁니다’라고 보도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변 대표는 ‘낸시 랭의 가족사 등을 밝힌 것은 진실을 알리기 위한 언론인의 정당한 활동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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