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5.20 18:27
수정 : 2014.05.21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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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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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을 죽이고 싶다.”
세월호 참사 이후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평소 사형제도에 반대했던 이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심지어 선장을 그냥 죽이지 말고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매달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돌을 던져 쳐 죽여야 한다고 흥분하는 사람도 있다.
세월호 선장은 기울어지는 배에 사람들을 버려두고 팬티 차림으로 가장 먼저 도망갔다. 세월호 선장은 직무유기를 넘어 탐욕과 비겁의 대명사가 됐다.
검찰은 지난 15일 세월호 선원 15명을 구속기소하고, 선장 등 4명에게는 살인죄를 적용해 기소했다. 검찰이 선장 등에게 살인죄를 적용한 것은 이들의 비인간적인 행동을 엄벌해야 한다는 ‘공분’에 따른 것이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의중을 살핀 측면도 있다.
세월호 참사 발생 이후 박 대통령은 두 차례 ‘살인’이란 표현을 사용해 선장과 승무원들의 행동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박 대통령은 4월21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선장과 일부 승무원들의 행위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용납될 수 없는 살인과도 같은 행태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살인과도 같은 형태’란 대통령의 발언은 19일 대국민 담화에서는 ‘사실상 살인행위’로 한층 수위가 높아졌다. “이번 참사에서 수백명을 버리고 도망친 선장과 승무원의 무책임한 행동은 사실상 살인행위입니다.”
지난달 21일 대통령의 ‘살인과도 같은 행태’란 발언을 두고 국내 언론들은 선장에 대한 국민적 공분을 의식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외국 언론들은 박 대통령 발언을 비판했다. “대통령이 감정적으로 살인 이야기를 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영국 <가디언>) “세월호 승무원들을 살인죄로 미리 판결을 내린 것은 확실히 그릇된 일이다. 6월4일 지방선거가 두려워서인가”(미국 <월스트리트 저널>) “선원들의 무시무시한 실수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의 단어 선택은 분명히 도를 지나쳤다.”(독일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박 대통령의 연이은 ‘살인 발언’은 ‘파렴치한 선장은 죽어 마땅하다’는 국민 정서를 반영한 것이다. 대중적인 인기에 영합하지만 헌법의 원칙들을 흔드는 발언이다.
헌법 제27조는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밝히고 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책임했던 선장과 승무원들도 헌법의 보호를 받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이들은 법원의 확정 판결이 있기 전까지는 무죄로 봐야 한다.
박 대통령은 살인죄로 기소돼 재판을 앞둔 세월호 선장과 승무원들에 대해 “사실상 살인행위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3권분립의 원칙과 충돌한다. 헌법 101조는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고 돼 있다.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은 입법부, 사법부와 함께 3권분립의 한 축이지 초헌법적 기관은 아니다.
법원 내부에서는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에 대한 민심 달래기 심판을 사법부에 떠넘기고 있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 선장 등에 대해 살인죄가 아니라 과실치사로 보는 판사들이 꽤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법리만을 따져서 검찰의 살인죄 적용을 기각할 경우 ‘수백명을 죽인 선장과 선원을 비호했다’는 여론의 비판을 뒤집어쓸 것을 부담스러워한다고 한다.
세월호 사고 이후 박 대통령은 바쁘다.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고 새롭게 만들기 위해 명운을 걸겠다고 했다. 아무리 바빠도 법과 원칙을 지켜야 한다. 대통령은 판사가 아니다.
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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