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5.24 19:31
수정 : 2016.05.27 10:25
영화 <레버넌트>는 사실적이었다. 회색곰은 빠르고 강했다. 새끼 딸린 어미곰이라서 극도로 예민했다. 위협자한테 달려든 어미곰은 집요했다.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고, 억센 발톱으로 후벼팠다. 상대가 나뒹굴자 덜미를 짓눌러 제압했다. 승부는 이렇게 끝나는 듯했다. 휴 글래스(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분)가 주인공이 아니었다면 아마 죽었을 것이다. 모성애에 이끌린 어미곰이 순간적으로 새끼를 향해 등을 돌리는 반전이 일어났다. 바늘 끝 같은 찰나에 총알이 발사됐다. 곰은 마침내 널브러졌고, 휴 글래스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이미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 이 박진감 넘치는 곰의 습격 장면은 두려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우연히 영화의 무대인 미국 옐로스톤에 가게 됐다. 호숫가에 웅크리고 앉은 회색곰을 만났다. 태양이 서산에 뉘엿뉘엿 기울 무렵이었다. 사냥한 바이슨(들소)을 느긋하게 먹어치우는 중이었다. 곰은 서둘지 않고 들소를 뼈째 발랐다. 핏빛이 선연한 내장을 움켜잡은 채 우걱우걱 씹는 동작이 생생했다. 남은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와 까마귀가 얼쩡댔다. 인근 차도에는 탐방객이 몰려들었다. 사냥총 대신 배율 높은 쌍안경과 대포만한 사진기를 들고 있었다. 이들은 멀찌감치 100야드(91m) 밖에서 지켜봤다. 살아있는 야생 앞에서 입안이 바짝 말랐다. ‘추적 본능이 있으니 절대 등을 보이고 뛰지 말라’는 경고에 모골이 송연했다.
곰은 우리 민족에게 친근한 존재다. 예부터 신화, 우화, 동요에 자주 등장했다. 단군신화의 웅녀부터, 동요 ‘곰 세 마리’까지 다양하다. 곰인형을 끼고 잠들었던 추억은 가슴을 따뜻하게 만든다. 귀엽고 영리한 이미지 덕분에 스포츠 마케팅에도 두루 활용된다. 곰은 일찍이 프로야구 명문구단 두산의 상징으로 사랑을 받았고, 다가오는 평창올림픽 마스코트 후보에도 올라 있다.
우리가 곰의 가치에 눈을 뜬 것은 다소 늦었다. 환경부는 2004년부터 지리산에서 반달가슴곰 복원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반달곰은 10년 안에 멸종될 위기를 맞고 있었다. 생태계의 우산종인데다 문화적 상징성도 크다는 이유로 선택을 받았다. 촘촘한 모니터링으로 반달곰은 12년 만에 44마리로 늘어났다. 이 중 30마리는 자연 상태에서 태어났다. 2020년엔 50마리가 야생에 살게 된다. 개체수가 늘면서 인적·물적 피해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게 됐다. 하지만 복원사업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차츰 시들해지고 있다. 활동영역을 확보하고, 지역주민을 설득하는 노력도 뜸해졌다.
반면 100년 전 국립공원청을 설립한 미국의 곰 사랑은 눈여겨볼 만하다. 옐로스톤에 회색곰 700~1000마리, 요세미티에 흑곰 300~500마리를 키워냈다. 1872~2015년 옐로스톤에서 9명이 곰의 습격을 받아 숨졌지만 야생의 복원을 멈추지 않고 있다. 오히려 불곰이 연어를 잡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웹카메라를 설치하는 등 한발 더 내디뎠다. 우리 안의 곰들에 식상한 2200만명이 지난해 알래스카 브룩스 폭포를 지켜봤다. 다른 나라도 비슷하다. 캐나다는 5센트 동전에 곰을 새겼다. 중국은 판다곰을 외교에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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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관옥 호남제주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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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이 달라도 대부분 도시인들은 야생 곰의 일거수일투족에 열광한다. 영화와 다큐에 빠져들고, 자연에서의 조우를 체험하려 기꺼이 지갑을 연다. 예측 못할 위험과 경이로운 낯섦에 가슴이 쿵쾅거리기 때문이다. 너무 늦기 전에 우리도 자연에서 곰들과 공존하는 지혜를 배우면 어떨까. 어릴 때 곰과 마주친 아이들은 당시의 긴장과 흥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 멋진 경험을 후세한테 물려주려 더 애쓰지 않을까?
안관옥 호남제주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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