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2.12 18:00
수정 : 2017.02.12 19:15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경제성장에 대한 비관론이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힘을 더 얻고 있다. 이 비관론에는 각각 대충 ‘기술론’과 ‘도덕론’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두 가지 버전이 있다.
논리는 매우 단순하다. ‘기술론’은 저성장은 필연이라고 주장한다. 자원 고갈을 강조한 1972년 로마클럽의 <성장의 한계> 보고서와 일종의 기술적 포화를 주장하는 ‘장기정체’론이 대표적인 예다. 후자는 미국 경제학자 앨빈 한센에 의해 1930년대에 처음 제기된 이래 위기 때마다 재탕되고 있다. 반면 경제성장의 부작용을 강조하는 ‘도덕론’은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물질적 과잉에서 유래하는 만큼 인류의 길은 ‘탈성장’에 있다고 주장한다.
단순하니 반박도 쉽다. ‘기술론’은 어떤 특정한 상황을 절대화한다. 자원이든 기술이든 새로 발굴되고 개선되기 마련인데 말이다. 이런 비관론의 취약성은 이제까지의 역사가 보여준다. 한센이 미국 경제의 정체를 주장한 1930년대 중반 이래 80년 동안 경제규모와 1인당 소득이 각각 15배, 8배 이상 불어났으니 말이다. ‘도덕론’은 이러한 물질적 풍요의 기여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부의 증대는 인류의 생존가능성을 높였을 뿐 아니라 인간의 욕구와 관계를 다양한 방향으로 발달시킴으로써 인간을 개성 있고도 보편적인 존재로 고양시켰다.
이렇게 취약한데도 성장 비관론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그간 물질적 풍요가 만들어지는 틀거리였던 자본주의가 대중에게 희망을 주지 못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경제가 성장해도 빈부 격차만 커진다는 판에 박힌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더 중요한 건, 첨단 모바일 기술·3D프린팅·인공지능·우주탐사 등 지금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물질적 풍요와 인간적 발전을 가능케 할 수단들이 갖춰지고 있는데도 그것들이 경제성장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사람들이 경제성장을 싫어해서? 일자리 상실에 대한 대중의 ‘러다이트’ 식의 두려움 때문에? 천만에. 이제껏 온갖 비관주의와 두려움을 짓밟고 여봐란듯이 물질적 발전을 이뤄냈던 게 자본주의였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의’ 자본주의에는, 이미 존재하는 조건들조차 현실화해낼 능력이 없어 보인다. 이를테면, 자본주의에서 부의 증대는 ‘상품화’를 통해 진전되지만, 모바일 기술을 응용한 서비스들은 상품화, 곧 돈 낸 사람만 쓸 수 있게 만들기에 매우 까다롭다. 그 결과 우리는 이 멋진 기술을 가지고 고작 스마트폰으로 게임이나 하고 있다. 인공지능 일반화가 가져올 물질적 풍요를 의심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자본주의 아래선 이 풍요로움을 특정 자본가가 자신만의 이윤으로 확보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과연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자본주의가 저절로 소멸되리란 얘기가 아니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도 어떻게든 자기 식대로 변형하는 게 자본주의다. 그에 따라 늘 기술의 잠재력은 제한되고 왜곡돼 왔고, 그 과실도 일부에 의해 독점되었다. 그래서 정치가 중요하다. 체제의 지배자들은 이를 잘 안다. 이미 그들은 경제의 비약적인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자기 자신과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일자리 상실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이나 누구도 해결 못하는 경제의 장기침체라고 선전하는 데 열정적이다. 이렇게 시간을 벌면서, 궁극적으로 그들은 낡은 것으로 판명난 소유제도를 변형하고 이를 가장 잘 보호할 규제집합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적 차원에선, 성장의 의의를 옹호하고 그것을 가장 잘 북돋을 수 있는 생산과 소유·분배 제도를 고민하는 게 ‘진보’다. 이런 ‘진보’를 다가오는 대선에서 보고 싶다.
gg@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