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1.30 18:15
수정 : 2018.01.30 18:52
이본영
국제뉴스팀장
집단적 분노는 사회 진보의 동력이다. 사례는 무수하다. 바로 그게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을 타격했다. 정치는 분노의 조직화다. 문 대통령으로서는 그 흐름을 타다 돌연 분노의 역류에 휘말렸다.
다수의 논자가 분석을 위해 세대론을 꺼냈다. 20~30대의 반란이란다. 대통령을 떠받쳐온 세대의 이반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은 지당하다. 비트코인 규제 시도,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을 비롯한 북한의 평창겨울올림픽 참가 논란이 사회적 분노의 양대 축으로 운위된다.
집단적 분노는 기본적 정당성을 소유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집단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다. 그리고 불의와 불평등을 배척하는 성향을 지녔다. 누군가가 당한 불의는 곧 집단 전체에 대한 모욕이고 도발이다. 분노와 행동은 확장된 자기를 위한 투쟁인 동시에 이타성과 정의에 대한 갈구라는 숭고함이 깃든 경우가 많다. 1987년의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에 대한 학생들의 분노, 7년 전 ‘아랍의 봄’을 연 튀니지 행상의 분신에 대한 민중의 분노 같은 것이다. 자기 그룹이 구조적으로 억압당하고 차별받는다는 인식이 팽배하면 분노의 에너지는 커진다. 세계를 휩쓰는 ‘미투’ 운동도 그렇다.
‘모든 집단적 분노가 정당한가’보다 유용한 질문은 방향과 요구까지 포함한 분노의 표출이 적절하고 정당한가이다. 분노 자체는 자연발생적이고 즉각적이라 이성의 개입이 제한된다. 기왕 터진 분노가 어디로 향해야 할지, 어떻게 달래고 해결하는 게 바람직한지가 관건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구나 분노할 수 있으며, 그러기 쉽다”고 했다. 한데 “적절한 상대에 대해, 적절한 정도로,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목적으로, 적절한 방식으로 분노하기는 어려우며, 모두가 그런 능력을 지니지는 못한다”고 했다.
비트코인 투자자들이 ‘국가가 언제 헛된 희망이나마 품게 해줬냐’고 항변하는 것은 정당하다. 신분 상승 사다리는 밑 칸이 사라졌다. 능력주의가 비집고 들어가야 할 좁은 입구에는 배경과 연줄이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앉았다. 그러나 내 이익이 궁극적으로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하는 방식으로는 사회경제적 문제 해소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없다. 극소수의 대박을 위해 다수가 눈물을 흘릴 수 있다.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가 싸늘한 반응을 만난 것은 갑자기 웃는 얼굴로 바꾸기가 어려운 이들이 많아서이기도 하다. 남쪽에서 보기에 만들면 안 될 무기를 만들어 풍파를 일으킨 것은 북쪽이다. 그에 대한 분노도 정당하고 자연스럽다. 이제 분단 73년이다. 한 사람이 나고 졌을 만한 시간이 흘러 ‘남한만의 민족주의’도 고착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폭발력 높은 가스로 가득 찬 방에는 분노의 불꽃을 던질 게 아니라 구멍으로 가스를 빼내야 한다. 멀리서 ‘화염과 분노’를 날릴 수 있는 쪽과 우리는 다르다.
이 와중에 풀무질에 열심인 일부 언론의 노력이 눈물겹다. 이들에게는 좌파의 선동에 곧잘 넘어가던 젊은이들이 현대적 개인주의를 체득한 신인류로 일변했다. 개인주의에도 등급이 있어, 좌파 정부를 공격하는 개인주의는 최상급인가 보다. 마침 지금의 20대는 ‘586세대’가 부모인 경우가 꽤 될 테니 프레임 짜기의 명수들이 이걸 놓칠 리 없다. 그런데 왜 젊은이들의 좌절에 깊이 공감하는 듯한 이들은 최저임금, 비정규직 정규직화, 부동산 문제에는 다른 얘기를 할까? 왜 ‘매력 공세’를 비난하면서 자신들이 소유한 종편은 현송월 단장 꽁무니를 주야장천 쫓았을까? 감시하려고? 정치적, 상업적 목적으로 정당한 분노를 부당하게 이용하려는 야바위이자 뻔한 이이제이 수법이다.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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