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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7.24 18:24 수정 : 2018.07.25 13:43

신동명
영남팀장

일제 강점기였던 1917년 11월10일 대한광복회 대원들이 경북 칠곡의 친일 부호 장승원을 권총으로 사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광복회의 군자금 요구에 불응하고 일제 경찰에 밀고하려 해 시범 사례로 ‘처단’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광복회 조직은 일제 경찰에 노출됐고, 장승원의 처단을 지시한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은 한달여 뒤 체포됐다. 그는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르다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8월13일 대구형무소에서 숨을 거뒀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 6권에 ‘육혈포 강도’라는 제목으로 박상진 의사와 대한광복회의 활동이 나온다. 당시 일제 경찰과 신문이 광복회를 지칭한 게 ‘육혈포 강도단’이다. 소설은 박 의사를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왜놈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누구보다 굳게 가진 인물이었다. 왜놈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군대를 양성해야 하고, 군대를 양성하려면 막대한 군자금이 있어야 했다. 그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조직한 것이 대한광복단(대한광복회)이었다”고 소개한다.

박 의사는 1884년 12월7일 울산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났다. 양정의숙에서 법률학을 공부하고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해 평양법원에 발령받았으나,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자 사표를 던지고 가산을 정리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박 의사의 고향 울산에서 최근 그의 공적 재평가와 서훈 등급 격상운동이 일고 있다. 박 의사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1~5등급 중 3등급에 해당한다. 경술국치에서 1919년 삼일운동까지 엄혹했던 일제의 무단통치 시기에 전 재산과 젊음을 송두리째 바쳐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공적에 비해 서훈 등급이 낮게 평가됐다는 게 격상운동의 취지다. ‘박상진 의사 추모사업회’는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펴낸 <한의 독립투사 고헌 박상진>에서 “박 의사의 행적이 친일세력의 조직적인 방해공작과 분단한국의 정치상황과 맞물려 대부분 가려지고 말았다”고 했다. 광복회가 처단한 친일 부호 장승원이 정부 수립 이후 국회 부의장과 국무총리까지 지낸 대표적인 보수정치인 장택상의 아버지라는 사실도 공적 평가에 대한 의구심을 더하는 요소다.

유관순 열사도 박 의사와 같은 등급의 서훈을 받아 충남과 천안에서 지난 5월 청와대 누리집에 열사의 공적 재평가와 서훈 등급 격상을 촉구하는 국민청원을 내기도 했다. 기존 서훈 등급의 조정을 가능하도록 하는 상훈법 개정법률안도 국회에서 잇따라 발의돼 계류 중이다.

독립유공자의 공적 평가 및 서훈이 대부분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되지 못했던 시기에 이뤄지다 보니 그 공정성과 객관성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일고 있다. 지난 2월 대법원의 친일행위 인정 판결로 건국훈장 서훈이 박탈된 김성수의 서훈 등급이 유관순 열사나 박상진 의사보다 높은 2등급이었다는 사실만 봐도 독립운동가보다는 친일 인사들에게 더 후했던 건국훈장 서훈은 근본적인 재평가가 필요해 보인다.

또 독립유공자의 서훈을 등급화하는 것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서훈의 등급을 나눈다는 것은 공적의 경중과 우열을 전제로 한 것인데, 과연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들의 공적에 경중과 우열을 따져 누구나 공감할 등급을 매길 수 있을까? 서훈을 등급화하기보다는 독립운동 방식이나 유형에 따라 서훈을 구분해 다양한 독립운동의 지평을 우열 없이 평가하는 방식도 생각해볼 수 있다. 독립유공에 등급을 매겨 서열화하는 일 자체가 일제의 잔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tms1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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