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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1.16 15:32 수정 : 2007.11.21 15:49

[유달승 중동이야기] 1. 영웅? 광신자? 안 풀린 답
이슬람혁명 이끌어 원리주의가 ‘주류’ 득세한 뿌리

우리에게 중동은 신비로운 세계로 알려져 있다. 그 대표적인 얘기가 아라비안 나이트이다. 중동에서는 아라비안 나이트를 ‘천일야화(千一夜話)’라고 부른다. 천일야화는 1천 1일 밤 동안 계속되는 이야기인데, 그 곳에서는 천(千)이 숫자의 의미도 있지만 ‘많음’, ‘무수함’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천일(千一)은 무궁무진하다는 뜻이다.

어릴 적에 보았던 만화 ‘신밧드의 모험’에서는 주인공이 마법 양탄자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다. 옛날에는 날아다니는 양탄자가 있었는데, 과학기술이 과거보다 훨씬 더 발전한 현대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양탄자가 없다는 사실에 의문이 들었다. 그러한 의문점은 중동에 직접 가서 생활하면서 해결되었다. 비가 오지 않은 지역의 주거형태는 흙으로 만든 평평한 지붕을 가지고 있다. 또한 사막의 도시는 끊임없는 이민족의 침입에서 방어를 위한 목적으로 조그마한 골목과 골목들이 마치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다. 날아다니는 양탄자의 상상력은 바로 지붕과 지붕을 뛰어다니는 모습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흔히 중동하면 ‘세계의 화약고’라고 부를 정도로 분쟁지역을 떠올리게 된다. 왜 이곳은 끊임없이 분쟁이 발생할까? 그것은 바로 이 지역이 매우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중동은 풍부한 석유 자원을 가지고 있고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삼대륙이 만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중동을 다스리면 세계를 다스린다”는 말이 있다.

중동은 신비의 세계가 아니다. 단지 우리가 알지 못하고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일 뿐이다. 이제 미지의 세계로 떠나 그 베일을 하나하나 벗겨보자.

한 소년의 운명을 바꿔놓은 사건이 있었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은 세계를 뒤흔든 놀라운 사건이었고 이를 바라본 소년의 가슴 속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79년 2월 1일 비행기에서 검은 도포 차림에 흰 수염을 휘날리며 내려오는 한 노인이 있었고 그가 바로 호메이니였다. 그의 근엄한 눈빛은 세상을 향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것 같았다.

▶주위 대학생 형들의 답변, 천차만별

이란의 이슬람혁명을 이끈 호메이니.

소년은 주위의 대학생 형들에게 찾아가서 그 의문을 해소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의 답변은 너무나도 천차만별이었다. “호메이니는 이란의 영웅이야. 부패한 독재권력에서 이란을 해방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광신자야. 현대사회에서 종교를 주장하다니…. 앞으로 이란사회가 어떻게 될 지 걱정이다.” 한 사건과 인물에 대한 평가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전세계가 서구화와 근대화로 나아가고 있는데, 지구촌 또다른 곳에서는 반서구화를 주장하다니... 과연 그들의 외침은 무엇일까? 그들은 왜 다른 길을 가려고 할까? 앞으로 나아갈 길은 오직 하나이고 반드시 이것만이 정답이라고 배워온 소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제대로 이해하려 직접 보고 몸으로 체험하기로 결론

그 소년은 이슬람혁명과 호메이니에 대한 많은 의문점을 갖게 되었고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 중동과 이슬람 문제에 빠져 들어갔다. 그는 그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란 유학을 선택했다. 사실 이란 유학을 결정하기 전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다.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미국으로 갈까 아니면 영국, 혹시 이란은 어떨까? 막상 이란유학을 결심하였지만 이란에는 이제까지 한국유학생이 없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호메이니와 이슬람혁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란을 직접 보고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결론내렸다.

▶테헤란 공항 내려서자마자 새삼 느낀 무지

1992년 10월 21일 새벽 이란의 메흐라바드(Mehrabad) 국제공항에 도착한 그는 테헤란의 참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그가 상상했던 이란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광장 가운데의 커다란 분수대, 도로 양변에 길게 늘어진 나무 그리고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막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순간 이란에 대한 그의 무지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공항에서 그를 처음으로 맞이한 사람은 호메이니였다. 커다란 호메이니의 초상화를 보면서 한순간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 호메이니의 눈빛은 세상을 향한 분노와 저주의 이미지에서 인정많은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이란 곳곳에는 호메이니의 흔적이 남아 있다. 때로는 아이를 안은 인자한 모습의 호메이니가 있고, 때로는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와 저주의 시선을 보이고 있다. 또한 호메이니의 연설문이 거리 곳곳에 쓰여 있다.

▶박사과정 입학 첫날 학과장이 면답 요구

테헤란대학교 정치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한 첫날이었다. 정치학과 학과장은 그 한국인 유학생에게 면담을 요구했다. 학과장은 이란에 유학을 온 목적과 관심분야 등 다양한 질문을 던졌다. 그들의 대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청소원 아저씨가 들어왔다. 아저씨가 들어오자 학과장은 일어나서 예의를 갖추었다. 청소원은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의 상관에게 말했다. “교직원의 수가 많아져서 제 일이 너무 힘듭니다. 제 보조로 한명을 더 채용해 주십시오.” 학과장은 청소원의 말을 듣고서 타당한 주장이라고 답변했다. 그들의 대화를 보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아니 상관에게 이렇게 떳떳하게 대하다니…. 자칫 잘못하면 직장까지 잃을 수 있을텐데…. 또한 학과장도 그의 말을 끝까지 경청했다. 이슬람에서는 평등을 강조한다고 하던데, 이것이 바로 신 아래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모습이 아닐까?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청소원 아저씨의 눈빛과 자신감은 나를 사로잡았다. 그의 순박한 눈빛은 상관을 똑바로 응시했고 자신의 주장을 주저없이 전개했다. 그의 당당함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것은 직업의 높고 낮음을 떠나 자신의 역할에 대한 애착과 긍지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그동안 그 역할에 대한 성실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화를 마치고 당당히 걸어나가는 그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자랑스러워 보였다.

1998년 2월 28일 유학생활을 마치고 떠나는 공항에서 다시 호메이니를 만났다. 움푹 들어간 호메이니의 검은 눈동자는 다시 무언가를 얘기했다. 그가 말하려고 했던 진정한 얘기는 과연 무엇일까?

▶아야톨라가 아닌 그의 이름 루홀라는 ‘신의 영혼’ 뜻

루홀라 무사비 호메이니(Ruhollah Musavi Khomeini). 이것은 아야톨라 호메이니로 알려진 그의 본명이다. 호메이니를 떠올리면 아야톨라(ayatollah)라는 단어가 연상된다. 하지만 아야톨라는 그의 이름이 아니라 시아파 성직자의 지위를 상징하는 용어이다. 아야톨라는 ‘신의 징표’라는 의미이고 호자톨에슬람(hojjat ol-elsam: 이슬람의 증거)보다 높은 시아파 성직자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지만 호메이니는 아야톨라가 아니다. 사실상 아야톨라보다 훨씬 더 높은 지위인 아야톨라 올 오즈마(ayatollah ol-ozma; grand ayatollah)로서 최고위 시아파 성직자이다. 그의 이름 루홀라는 ‘신의 영혼’을 의미한다.

▶1천만명 넘은 조문객, 이란 전역이 암흑의 거리로

호메이니는 1989년 6월 4일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장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서 1천만 명이 넘는 조문객이 테헤란의 거리를 가득 채웠다. 그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이제 우리는 고아가 되었다”고 절규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8명이 사망했고 4백여명이 부상당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이란인들은 검은 옷을 착용했기 때문에 이란 전역은 암흑의 거리가 변했다.

▶영혼과 흔적 이슬람세계 곳곳에

호메이니는 사라졌지만 그의 영혼과 흔적은 아직도 이슬람세계 곳곳에 남아 있다. 그는 이슬람세계의 영웅이었다. 그는 이란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1979년 이슬람혁명을 일으켜 팔레비 왕정체제를 붕괴시켜 이슬람공화국을 수립했다. 이슬람혁명은 사실상 그의 지도력으로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이슬람세계에서 이슬람원리주의 운동을 확산시킨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슬람의 가치와 전통을 주장하는 이슬람혁명은 이슬람세계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고 이슬람혁명 모델은 이슬람세계의 대안 이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 마르크스 이론을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 운동은 급속히 쇠퇴했지만 이슬람원리주의 운동은 이슬람세계에서 점차 주류 이론으로 등장하고 있다.

▶서구의 평가는 ‘이란 고립시키고 전통사회로 복귀’

하지만 서구세계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다르다. 서구에서는 그를 광신적인 독재자로 묘사한다. 그의 이슬람혁명 수출이 중동에서 이란을 고립시켰고 이란을 전통사회로 복귀시켰다고 지적한다. 독일 신문에서는 호메이니의 귀국을 다음과 같이 썼다. “고도 1만 2천 미터의 상공에서 고국으로 달리는 이 경건한 노인은 마치 소리의 날개를 타고 중세로 돌아가는 것 같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1979년 이슬람혁명과 1980년 미대사관 인질 사건 이전까지 그를 알지 못했다. 검은 터번을 걸치고 하얀 턱수염을 휘날리며 분노한 눈빛으로 세상을 향해 무언가를 주장하는 한 노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느 한순간 갑자기 세상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이란인들은 그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팔레비 샤(이란의 왕)에 대항하여 투쟁해 온 정신적 지도자였다. 그는 15년 동안 터키, 이라크 및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지속적으로 팔레비정권을 반대한 성명서와 녹음테이프를 통해 항상 이란인들의 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지금도 이슬람세계에서 전설적인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

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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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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