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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1.30 14:44 수정 : 2007.11.30 15:03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3
1891년 담배불매운동이 이란 역사에서 성직자 영향력 확대

호메이니의 가문

호메이니의 가문은 제7대 이맘 무사 알 카젬(Musa al-Kazem)의 후손으로 전통적인 성직자 집안이었다. 오늘날 이란은 대표적인 시아파 국가이다. 이란의 역사에서 사파비조(1501-1722)의 수립은 새로운 분기점이 되었다. 사파비조의 왕은 제7대 이맘의 자손이라고 자처하면서 시아파 성직자의 지원으로 권력을 장악했고 이후 시아파를 국교로 선포했다.

호메이니의 조상들은 18세기말 이란 북동부의 니샤푸르(Nishapur)에서 인도 북부 러크나우(Lucknow) 지역으로 이주해 킨투르(Kintur)라는 작은 마을에 정착했다. 러크나우 지역은 인도에서 시아파의 중심지로 수많은 시아파 신학교와 교육기관이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시아파 종교 교육과 지도에 온 힘을 기울였다.

호메이니의 조부인 세예드 아흐마드 무사비 힌디(Seyyed Ahmad Musavi Hindi)는 킨투르에서 태어났고 1830년 이라크의 나자프로 성지순례를 갔다. 나자프는 시아파의 중요한 성지이다. 이로 인해 나자프에는 중요한 시아파 교육의 중심이었고 유명한 시아파 성직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나자프는 오스만 터키제국의 영토였지만 이란 정부의 영향력이 훨씬 더 강력하게 미친 곳이었다. 나자프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호메인에서 가까운 파라한(Farahan) 마을의 지주 출신인 유세프 한 카마레히(Yusef Khan Kamarehi)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 1834년 카마레히는 그를 이란으로 초대했고 이 여행에서 그는 그곳의 종교 활동을 위하여 호메인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그는 1839년 이란행을 결정하고 더 이상 인도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이 결정으로 그는 인도와 단절했지만 그의 동시대인들 사이에서 여전히 인도출신이라는 ‘힌디(Hindi)’로 알려졌다. 이것은 그의 후손들이 내려받은 칭호였다. 1978년 이슬람 혁명이 발발하기 직전 팔레비 정권은 호메이니를 인도인이라는 가족배경을 폭로하면서 이란 사회의 이방인으로 묘사했다.

호메이니. 유달승 교수 제공.
1841년 그는 유세프 한 카마레히의 여동생 사키네(Sakineh)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 사키네는 세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 세예드 모스타파 힌디(Seyyed Mostafa Hindi)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호메이니의 아버지이다. 1869년 그의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13살의 어린 소년 모스타파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종교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는 초기에는 에스파한 부근의 신학교에서 공부했고 이후 나자프와 사말라로 가서 유명한 성직자 밑에서 종교 교육을 받았다. 그는 나자프에서 하지 미르자 무함마드 하산 쉬라지(Hajji Mirza Muhammad Hasan Shirazi)의 제자가 되었다.

담배불매운동


쉬라지는 당시 시아파 법학의 대가였고 담배불매운동을 확산시킨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카자르조(Qajar: 1796-1925)의 나세르 알 딘 샤(Naser al-Din Shah: 1848-1896년 재임)는 1890년 영국인 탈보트(G. Talbot)에게 이란 내의 담배 전매독점권을 주었다. 이 조치는 담배를 경작하는 지주와 소작농 그리고 상인들에게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또한 물담배를 애호하는 많은 이란인들에게조차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생존권 차원에서 시작된 이 담배불매운동은 점차 왕과 외세를 반대하는 저항운동으로 발전했다. 1891년 4월 영국 담배회사 직원들이 담배 주요 생산지인 쉬라즈에 도착하자 상인들은 시장의 문을 닫으면서 최초의 저항운동이 시작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해서 테헤란, 에스파한 및 타브리즈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반외세 저항운동이 확산되었다.

호메이니. 유달승 교수 제공.
마침내 12월 쉬라즈는 담배 사용을 금지하는 종교법령(Fatwa)을 선포했다. “신의 이름으로 자비로운 은총을! 오늘날 어떠한 형태로든 담배의 사용을 그 시대의 이맘에 대한 전쟁으로 단정한다. 신이여 그의 재림을 서두르소서!” 쉬라지의 종교법령은 이란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게 되었고 심지어 왕실의 규방에서조차도 그의 지시를 따르게 되었다. 결국 왕은 격렬한 저항에 굴복했고 영국담배회사는 담배 독점권을 반납하게 되었다.

담배불매운동은 이란현대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자 성직자의 역할을 부각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이전까지 시아파에서는 아흐바리(Akhbari) 학파와 우슬리(Usuli) 학파가 교리논쟁을 벌이면서 서로 경쟁했다. 아흐바리 학파는 성직자들의 독립적인 역할을 부정하면서 신자들이 종교 문제에서 예언자와 이맘들의 전통을 추종하면서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우슬리 학파는 이슬랍법과 교리의 해석에서 무즈타히드(Mujtahid)의 역할에 합법성을 부여했고 그들의 독자적인 해석을 강조했다. 무즈타히드는 쿠란(Quran)과 하디스(Hadith: 예언자의 언행론)에서 언급되지 않는 이슬람 문제에 대해서 이성과 유추로 새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또한 살아있는 무즈타히드의 결정을 따른다는 사실은 무즈타히드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부여했다.

이란 왕실의 부패와 사치가 극에 달하고 외세의 침탈이 본격화되면서 시아파 신자들은 점차 성직자 주위에 몰려들었고 양 학파의 대결에서 결국 우슬리 학파가 완전한 승리를 획득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우슬리 학파가 발전하여 마르자에 타클리드(Marja-e taqlid) 이론으로 등장했다. ‘마르자’는 원천, 근원이란 뜻이고 ‘타클리드’는 모방, 흉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모방의 원천’, ‘흉내의 근원’을 의미한다. 이것은 누가 가장 잘 예언자와 이맘의 전통을 올바르게 추종하는 성직자인가를 상징하는 단어이다. 수많은 무즈타히드 가운데 가장 위대한 무즈타히드를 추종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곧 시아파 성직자에게 보다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이 이론은 시아파의 주류로 나타났고 오늘날 대부분의 시아파 신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다.

호메이니. 유달승 교수 제공.
그의 스승 쉬라지가 사망한 1894년에 모스타파는 호메인으로 돌아왔다. 그는 세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이 있었는데, 호메이니는 세 번째 아들이었다. 호메이니가 태어난 지 여섯 달도 지나지 않은 1903년 3월 그의 아버지 모스타파는 아라크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괴한들의 공격을 받아 살해당했다. 암살범들의 신원은 곧 밝혀졌고 그들은 그 지역 지주 바흐람(Bahram), 미르자 쿨리 술탄(Mirza Quli Sultan), 자파르 쿨리(Jafar Quli)이었다. 당시 8살이었던 장남 모르테자(Morteza)는 1988년 파스다레 이슬람(Pasdar-e Islam)이란 잡지에서 아버지가 지방 영주에게 농민들을 탄압하는 지주들의 횡포를 알리기 위해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살해당했다고 썼다. 바흐람은 곧 체포되어 감옥에서 사망했지만 나머지 두 명은 여전히 주민들을 괴롭혔다.

결국 모스타파 가족은 테헤란에 있는 세예드 아볼카셈(Seyyed Abolqassem)과 같은 영향력있는 성직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군대가 파병되어 그들을 체포해서 테헤란으로 이송했다. 미르자 쿨리 술탄은 감옥에서 사망했지만 자파르 쿨리는 여전히 비호하는 세력으로 인해 재판이 진행되지 않았다. 1905년 4월 모르테자와 둘째 누레딘(Nureddin)을 비롯한 일가족은 테헤란으로 가서 이의를 제기했다. 10살짜리 모르테자는 아인 알 도울레(Ayn al-Dowleh) 수상 접견실에 가서 “만약 당신이 공정하시다면 우리에게 그 살인범을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 스스로 그를 죽일 겁니다”면서 불만을 제기했다. 1905년 5월 9일 자파르 쿨리는 참수형을 당했고 일가족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1891년 담배불매운동은 이란의 역사에서 성직자의 영향력을 확대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고, 1906년 입헌혁명의 서막을 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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