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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2.06 14:11 수정 : 2007.12.06 14:22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4
외세의 개입과 국왕 전횡 반대하는 반식민주의·반전제주의 운동

미완의 입헌혁명

1906년 이란에서는 입헌혁명이 일어났다. 입헌혁명은 중동에서 발생한 최초의 근대화 혁명이었다. 입헌혁명은 외세의 개입에 반대하는 반식민주의 운동이자 국왕의 전횡에 반대하는 반전제주의 운동이었다.

20세기 초반 이란의 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영국과 러시아는 이란 왕실에 대한 내정간섭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고 이에 따라 중앙 정부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또한 심각한 경제 불황이 나타나면서 이란사회는 위기 상황에 봉착했고 전국 각지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1905년 12월 아인 알 도울레 수상은 설탕 가격 폭등을 근거로 테헤란 상인을 체포하여 공개 태형을 명령했다. 이 사건은 이란의 현실에 불만을 품은 대중들의 정치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테헤란 시장의 파업을 시작으로 테헤란 곳곳에서는 대규모 군중집회가 개최되었고 곧 이란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들은 수상의 퇴진뿐만 아니라 의회와 헌법 제정을 통한 전제군주제의 종식을 요구하게 되었다. 1906년 6월과 7월에는 시위대들이 테헤란에 있는 영국공사관 앞에서 항의집회를 개최하면서 왕을 압박했다. 8월 5일 무자파르 딘 샤(Muzaffar al-Din Shah: 1896-1907년 재임)는 결국 입헌운동에 굴복하여 제헌을 약속하는 포고령을 발표했고 10월 7일에는 최초로 의회가 개원되어 12월 30일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은 1830년 벨기에 헌법을 토대로 만들었다.

투쟁하는 성직자들. 유달승 교수 제공.
입헌혁명은 초기에 상인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지만 성직자들이 개입하면서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아야톨라 미르자 무함마드 호세인 나이니(Mirza Muhammad Hossein Naini)는 최초로 절대정부 대신 입헌정부를 시아파 법학의 틀 내에서 논의했다. 그는 이맘의 은폐기 동안 지배자의 통치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이론을 제기했다. 이 이론은 이제까지 시아파 세계의 주류 이론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시아파에서는 이맘이 통치하는 국가를 가장 이상적인 국가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들은 이맘이 통치하지 않는 정부를 찬탈 정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암묵적으로 현실 정부를 인정하면서 무정부 상태보다는 전제군주제가 낫다고 평가했다. 입헌혁명은 이란의 정치체제를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이 이론에 반대하는 견해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성직자가 쉐이크 파즐라 누리(Sheikh Fazlollah Nouri)였다. 누리는 처음에는 전제정치에 반대하는 입헌운동을 지지했으나 제1차 의회에 참석한 후 입장이 바뀌었다. 그는 의회의 역할을 이슬람법에 토대를 둔 법률을 비준하고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입헌정부 대신 이슬람정부를 제기하였다. 그는 이맘의 부재시 이슬람법을 적용하는 최상의 정부가 전제정부라고 결론내렸다. 1909년 7월 31일 입헌파는 봉기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그를 체포했고 곧 사형시켰다.

신학생 호메이니. 유달승 교수 제공.
그 당시 시아파 성직자들은 정치의 직접 개입을 반대했고 그 대신 입법심의권을 주장했다. 이것은 이슬람법학자에 의해 선출된 5명의 울라마위원회가 이슬람법에 위배되는 법률의 비준을 방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기구는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결국 이 기능은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이슬람공화국 헌법에서 6명의 이슬람법학자와 6명의 판사들로 구성된 헌법수호위원회를 통해서 실현되었다. 헌법수호위원회는 헌법 해석권을 가지고 있어서 의회에서 비준된 법률을 심사할 수 있고 대통령, 국회의원 및 국민투표의 감독권을 가지고 있다.

1907년 1월 무자파르 딘 샤가 병석으로 사망하자 무함마드 알리 샤(Muhammad Ali Shah: 1907-1909년 재임)가 즉위했다. 그는 러시아 장교가 지휘하는 코사크 여단을 통해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다수의 국회의원을 구속했다. 이에 반발하여 이란 전역에서는 헌정 복귀를 주장하는 무장봉기가 발생했고 1909년 7월 입헌파는 수도 테헤란에 입성해 왕을 폐위시켜 그의 아들 술탄 아흐마드(Sultan Ahmad: 1909-1925년 재임)를 추대했다. 하지만 이란의 의회는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으로 정국은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고 외세의 침탈은 더욱 가속화되었지만 무기력해진 중앙정부는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게 되었다. 1911년 영국의 묵인 아래 러시아는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시도해 결국 입헌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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