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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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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승의 중동이야기] 5
“나는 어릴 적부터 전쟁을 치렀다”
20세기 초 이란 각지에서는 산적들이 출몰해서 마을을 습격했고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으며 호메이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흐티야르 부족이 마을을 공격했을 때, 어린 호메이니와 그의 형제들은 어쩔수 없이 총을 들어 가정을 지켜야만 했다. 훗날 호메이니는 이런 기억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전쟁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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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 신학교에서 호메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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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이니의 어머니 하자르(Hajar)와 숙모 사헤베(Sahebeh)는 교육에 대한 대단한 열정을 보였고 신앙에 대한 사소한 문제도 엄격히 다루었다. 호메이니는 7살이 되었을 때, 집 부근의 마크탑하네(Maktabkhaneh)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옛 서당과 같은 역할을 했다. 나이 많은 성직자들은 동네 아이들을 모여 놓고 이슬람 경전인 쿠란을 교과서로 삼아서 읽고 쓰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곳의 교육방식은 매우 단조로운 암기식이었다. 아이들은 성직자가 말한 구절을 큰소리로 반복하면서 외웠다. 호메이니는 이슬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곧 쿠란을 암송한 무슬림에게 주는 칭호인 하페즈(Hafez)를 받았다. 또한 그는 시를 사랑하는 문학 소년이었다. 그는 이란의 서사시 왕서(Shahnameh)를 매우 좋아했다. 페르도우시(Ferdowsi: 935-1020)는 가즈니조(Ghazna: 977-1186) 시대의 궁정시인으로 약 30여년에 걸쳐 6만구에 달하는 왕서를 썼다. 왕서는 왕에 대한 찬미를 다룬 왕의 이야기가 아니다. 왕서는 이란의 건국에서 사산조(Sasan: 224-652)의 멸망에 이르는 내용으로 이란의 신화와 전설 그리고 역사를 다룬 대서사시이다. 또한 그는 하페즈(Hafez: 1320-1389)와 사아디(Saadi: 1184-1283/1291?)의 시를 읽고 암송하면서 페르시아 문학에 심취되었다. 훗날 그의 저서에는 인용되지 않은 유명한 시인의 구절이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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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 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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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 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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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호메이니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980년 테헤란에 있는 호메이니를 찾아온 콤 방문객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디에 있든 나는 콤의 시민이고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내 마음은 항상 콤에 있고 그곳의 시민들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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